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기수(耆叟). 민신지(閔愼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형손(閔亨孫)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민휘(閔暉)이며, 어머니는 소우흥(蘇雨興)의 딸이다. 집의 민수원(閔壽元)의 형이다.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 반정(反正) 후 중종이 처음 실시한 식년 문과에 3등으로 급제, 홍문관정자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저작·박사를 거쳐 1515년 홍문관교리에 올랐다. 이때 북도에서 이정호(李挺豪)의 무고사건이 일어나 민심이 흉흉하였는데, 선유경차관(宣諭敬差官)으로서 이를 회유하고 돌아왔다. 1516년(중종 11) 문과 중시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사헌부집의를 역임하며 경연관과 언관으로 활동하였다.
1523년 황해도경차관이 되어 흉년과 도둑으로 흉흉한 민심을 위무하고 돌아왔으며, 이어서 사간·홍문관직제학을 역임하였다. 사림의 신망을 받으며 언관활동에 충실하던 민수천은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편에 서서 두둔하였으며, 1524년 김안로가 파직, 폐출되자 심언광(沈彦光) 형제와 함께 수시로 방문, 위로하는 한편, 조정에 나아가서는 김안로의 재등용을 주장하였다.
그 때문에 반대파의 견제로 강원도관찰사·황해도관찰사 등 외직과 대사성과 같은 한직으로 물러났다. 온후하고 문장에 능하여 사유(師儒)의 직임을 오랫동안 담당하였으나, 인물을 잘못 파악하여 권신 김안로에 의부하였다고 하여 사림으로부터 신망을 잃었다. 학문에도 해박하고 행정실무에도 능하였다고 하여 민수천이 죽자 나라에서 부의(賻儀)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