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뇌중(賚仲). 민응회(閔應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점(閔點)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 민종도(閔宗道)이며, 어머니는 이만(李曼)의 딸이다.
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 1689년(숙종 15)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90년(숙종 16) 검열(檢閱), 1692년(숙종 18) 정언(正言)·지평(持平) 등을 거쳐, 순조롭게 홍문관과 한림(翰林)에서 활동하였고, 또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남인인 민언량은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로 아버지 민종도 등을 비롯한 다른 남인들과 함께 찬배(竄配)되었다.
그 뒤 1699년(숙종 25)에 풀려나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오빠 장희재(張希載)와 친교하면서 남인의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사망하고 국모모해사건의 전모가 드러나 이 사건을 주동한 희빈장씨는 물론이고 장희재와 친교하였던 다른 남인들도 옥사(獄事)에 연루되었다. 이때 민언량은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