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항렬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정언, 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유화(幼和)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45년(영조 21)
사망 연도
1776년(정조 즉위년)
본관
여흥(驪興, 지금의 경기도 여주)
주요 관직
정언|승지
정의
조선 후기에, 정언, 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유화(幼和). 고조부는 숙종비 인현왕후 아버지인 민유중(閔維重), 증조부는 좌의정 민진원(閔鎭遠), 할아버지는 승지 민통수(閔通洙)이고, 아버지는 부솔(副率) 민백선(閔百善)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음서로 관계에 나아가 1771년(영조 47) 정언(正言)이 되고, 이듬해 언관의 권위와 역할이 떨어진 것을 상소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향리로 쫓겨났으며, 1775년 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이 세손으로 있을 때 벽파(僻派)인 홍인한(洪麟漢)·한익모(韓翼暮)·정후겸(鄭厚謙)·윤양후(尹養厚)·윤약연(尹若淵)·홍지해(洪趾海)·홍찬해(洪纘海)·윤상후(尹象厚)·홍상간(洪相簡) 등의 일당에 가담하여 세손의 대리청정과 즉위를 반대하였던 관계로 모두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에 민항렬도 홍상간 등과 함께 같은 해 7월에 처형되었다. 그 뒤 1862년(철종 13) 광주(廣州)의 사노(私奴) 필손(弼孫)의 신원으로 그 관작이 복구되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명의록(明義錄)』
집필자
박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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