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유화(幼和). 고조부는 숙종비 인현왕후 아버지인 민유중(閔維重), 증조부는 좌의정 민진원(閔鎭遠), 할아버지는 승지 민통수(閔通洙)이고, 아버지는 부솔(副率) 민백선(閔百善)이다.
음서로 관계에 나아가 1771년(영조 47) 정언(正言)이 되고, 이듬해 언관의 권위와 역할이 떨어진 것을 상소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향리로 쫓겨났으며, 1775년 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이 세손으로 있을 때 벽파(僻派)인 홍인한(洪麟漢)·한익모(韓翼暮)·정후겸(鄭厚謙)·윤양후(尹養厚)·윤약연(尹若淵)·홍지해(洪趾海)·홍찬해(洪纘海)·윤상후(尹象厚)·홍상간(洪相簡) 등의 일당에 가담하여 세손의 대리청정과 즉위를 반대하였던 관계로 모두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에 민항렬도 홍상간 등과 함께 같은 해 7월에 처형되었다. 그 뒤 1862년(철종 13) 광주(廣州)의 사노(私奴) 필손(弼孫)의 신원으로 그 관작이 복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