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윤부(潤夫), 호는 지애(芝崖). 초명(初名)은 민덕남(閔德男). 좌찬성 민효증(閔孝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의(閔義)이고, 아버지는 풍저창수(豊儲倉守) 민복(閔福)이며, 어머니는 구징(具徵)의 딸이다. 민순(閔純)의 문인이다. 목겸선(睦兼善)이 사위다.
1600년(선조 3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고, 주서(注書)·승지로 벼슬이 올라갔다. 1613년(광해군 5) 익사(翼社)·형난(亨難)의 두 공신에 책록(策錄)되어 여주군(驪州君)으로 봉군되었으며,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1614년 진향사(進香使)가 되었고, 1615년 동지 겸 진주사(冬至兼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3년 인조반정을 계기로 훈작(勳爵)을 박탈당하고, 원주로 물러나서 생활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행재소에 나와 국왕을 호위함으로써 다시 임용되어 춘천부사가 되고, 그 뒤 10여 년 동안 지방관을 지내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여서는 국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고 전란종식을 위하여 헌신, 노력한 공이 커서 자헌(資憲)에 이르렀다. 1638년 한성부판윤과 형조판서 및 지의금부사를 거쳐, 1647년 우찬성이 되었다. 그 뒤 1658년(효종 9) 판중추부사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치적 중에서 특이한 사실은 소금[鹽] 생산을 높이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염호(鹽戶)에 대한 역환미곡정책(易換米穀政策)을 제창한 일이다. 시호는 장정(莊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