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형남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윤부(潤夫)
지애(芝崖)
시호
장정(莊貞)
이칭
민덕남(閔德男)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4년(명종 19)
사망 연도
1659년(효종 10)
본관
여흥(驪興, 지금의 경기도 여주)
주요 관직
한성부판윤|형조판서|지의금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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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윤부(潤夫), 호는 지애(芝崖). 초명(初名)은 민덕남(閔德男). 좌찬성 민효증(閔孝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의(閔義)이고, 아버지는 풍저창수(豊儲倉守) 민복(閔福)이며, 어머니는 구징(具徵)의 딸이다. 민순(閔純)의 문인이다. 목겸선(睦兼善)이 사위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0년(선조 3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고, 주서(注書)·승지로 벼슬이 올라갔다. 1613년(광해군 5) 익사(翼社)·형난(亨難)의 두 공신에 책록(策錄)되어 여주군(驪州君)으로 봉군되었으며,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1614년 진향사(進香使)가 되었고, 1615년 동지 겸 진주사(冬至兼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3년 인조반정을 계기로 훈작(勳爵)을 박탈당하고, 원주로 물러나서 생활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행재소에 나와 국왕을 호위함으로써 다시 임용되어 춘천부사가 되고, 그 뒤 10여 년 동안 지방관을 지내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여서는 국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고 전란종식을 위하여 헌신, 노력한 공이 커서 자헌(資憲)에 이르렀다. 1638년 한성부판윤과 형조판서 및 지의금부사를 거쳐, 1647년 우찬성이 되었다. 그 뒤 1658년(효종 9) 판중추부사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치적 중에서 특이한 사실은 소금[鹽] 생산을 높이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염호(鹽戶)에 대한 역환미곡정책(易換米穀政策)을 제창한 일이다. 시호는 장정(莊貞)이다.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병자록(丙子錄)』(나만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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