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당나라에 유학하였으며, 외국인을 위한 과거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듯하다. 귀국한 뒤 한림대(翰林臺)·숭문대(崇文臺) 등 주로 문한기구(文翰機構)에서 활동하였다.
872년(경문왕 12) 시독우군대감 겸 성공(侍讀右軍大監兼省公)의 관직에 있으면서 불교식 한문으로 된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를 찬술하였는데 이것은 현재 남아 있다.
이밖에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말의 명필 요극일(姚克一)이 쓴 삼랑사비(三郞寺碑)를 찬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