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나주(羅州). 진사에 올라 광주목사록 겸 장서기(廣州牧司錄兼掌書記)에 임명되었고 전중시어사좌사간(殿中侍御史左司諫)을 역임하였다.
1155년(의종 9) 좌사간으로 급사중 민각(閔慤)과 더불어 합문(閤門)에 엎드려 시사를 논하였으나 회보(回報)가 없었다.
같은 해 8월 평장사 최자영(崔子英), 지문하성사 양원준(梁元俊), 기거사인 최누백(崔婁白), 좌정언 허홍재(許洪材), 우정언 최우보(崔祐甫)와 함께 국정의 자문에 응하였다. 그 뒤 상서이부낭중을 거쳐 상서형부시랑 겸 국학직강(尙書刑部侍郎兼國學直講)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