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면천(沔川). 자는 순경(舜卿), 호는 송애(松厓). 할아버지는 부사정(副司正) 박문희(朴文喜)이고, 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 박수의(朴守義)이며, 어머니는 증 호조참의 이윤화(李允華)의 딸이다.
5대조인 감사 박담(朴湛) 때부터 해주 입암촌(立巖村)에서 살았는데, 이이(李珥)가 1570년(선조 3) 교리직(校理職)을 그만두고 해주 야두촌(野頭村)에 거처를 잡자 나아가 수학하였다. 이 때 나이가 30세였으나, 이이가 자질을 아끼어 성리학 서적을 주어 힘써 공부해 동문(同門)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1573년(선조 6)에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581년(선조 14)에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국왕이 의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해주에서 의병 500인을 모아 대가(大駕: 왕실의 행차)를 호위해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으로 특진되었다.
사포서사포(司圃署司圃)를 거쳐 1594년(선조 27)에 해서생곡사(海西生穀使)로 파견된 뒤, 청양현감에 올랐다가 이듬해에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1598년(선조 31) 다시 벼슬에 나가 호조좌랑·평시서영(平市署令)을 거쳐 1601년(선조 34)에 공조정랑으로 사직하였다. 1605년(선조 38)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향리로 돌아와서는 스승 이이의 문집 간행에 앞장서, 1610년(광해군 2)에 70세의 나이로 동문계(同門契)를 만들어 이듬해에 문집을 간행하였다. 저서로는 스승과 문하의 문답을 적은 『석담어록(石潭語錄)』이 대표적인데, 『송애집(松崖集)』에 수록되어 있다.
1726년(영조 2)에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 가까이에 사우(祠宇)를 세워 배향되었고, 이것이 나중에 방현서원(傍賢書院)이 되었다. 1777년(정조 원년)에 유고(遺稿)의 간행이 이루어졌다. 여러 차례 추증되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온(文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