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박연은 음악에 밝은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으로 초명(初名)은 연(然),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 시호는 문헌(文獻)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문헌공의 시호는 영조 3년인 1767년에 내려졌다.
난계는 삼사좌윤(三司左尹) 박천석(朴天錫)의 아들이며, 어려서 영동향교에서 공부하였다. 28세(태종 5년인 1405)에 생원(生員)이 되었고, 34세에 문과급제하여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 등을 역임했다.
세종이 즉위하자 관습도감 제조(慣習都監提調)로 임명하여 음악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1425년(세종 7)에는 관습도감의 악학별좌(樂學別座)로서 향악 · 당악 · 아악의 율조와 악기의 그림 및 악보를 실은 악서(樂書)를 편찬하였다.
1427년(세종 9) 5월에 난계는 편경 12교를 만들어 자작한 12율관(律管)에 따라 음율을 연구하는 한편, 조회향악을 아악으로 대체했다. 1431년(세종 13)엔 남급(南汲) 정양(鄭穰)과 함께 회례(會禮)때에도 아악을 사용하게 하여 궁정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하였다.
1433년(세종 15)엔 회례아악을 제정한 공으로 말과 안장을 하사받았다. 그 이후로도 공조참의(工曹參議) ·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지냈고, 세종 27년에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다녀 와서는 인수부윤(仁壽府尹) · 중추원부사(中樞院副事) · 예문관 대제학(禮文館大提學)에까지 이르렀다.
1453년(단종 원년) 계유정난 때에 아들 박계우가 처형되었으나, 그는 3조에 걸친 원로라 하여 화는 면했으나 파직당했다. 고향인 영동으로 내려와 살다가 1458년(세조 4) 3월 23일에 서거하였으며, 그 유해가 심천면(深川面) 고당리(高塘里)에 모셔졌다.
난계의 음악사적 업적으로는 ① 악서 편찬 ② 편경 및 각종의 아악기 제작 ③ 조회아악 및 회례아악의 제작 ④ 제향아악, 특히 종묘악의 정정을 꼽는다.
박연 묘소의 묘역에는 묘비와 망주석 상석이 갖추어져 있는데, 소유자는 ‘밀양 박씨 종중’이다. 지정 당시의 관리자는 박윤현이었고 1997년 현재는 박응용이다. 신도비(神道碑:무덤 앞 또는 무덤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는 대제학 황경원(黃景源)이 지었다. 묘소 앞의 난계사(蘭溪祠)에다 영정을 봉안하고 제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