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안주 출신. 1929년 진남포공립상공학교(鎭南浦公立商工學校) 3학년 재학시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하였다가 학교를 퇴학당하였고, 1937년에 『조선전래동화집(朝鮮傳來童話集)』 및 「선구자(先驅者)」등을 저술, 작곡하여 민족자주의식을 선양하다가 원고를 압수당하는 등 곤욕을 치렀다.
1940∼1942년에는 친일문인 이광수(李光洙)·최재서(崔載瑞) 등을 공격하는 유인물을 문인들에게 배포하다가 발각되어, 중국 산시성[山西省] 극난파(克難坡)로 망명하여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1943년 2월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여 광복군가인 「압록강행진곡」을 작사하여 광복군의 사기를 앙양시켰으며, 미군전략정보처(OSS) 안에 한국인 공작반을 설치하도록 하는 데 큰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1943년 11월 김구(金九)의 소명을 받고 충칭[重慶]에 도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부 선전위원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미군전략정보처 안의 한국인 공작반에 특파되어 일본군 안의 정세에 관한 정보수집업무와 광복군의 존재가치를 선전하여 미군으로 하여금 광복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한미합작훈련문제를 실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44년 5월 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政訓處) 선전과원(宣傳科員)으로 활약하였다. 1945년 6월 지대장 이범석(李範奭)을 도와 한미연합군사훈련 실시를 성공시키는 한편, 광복군총사령부 선전과장에 임명되어 활약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에 건국포장이 수여되었고, 1990년 애국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