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선천 출신. 3·1운동 당시 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를 일으킨 선천 신성학교(信聖學校)에 재학 중이었다.
만주 관전현(寬甸縣) 소재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의 결사대원 이학필(李學弼)·임용일(林龍日)·김응식(金應植) 등이 찾아온 것을 기회로 1920년 8월 24일 방한하는 미국의원단에게 독립진정서를 제출하고, 동시에 선천 정거장과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독립만세를 불러 독립의지를 과시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학필은 다시 만주로 가서 폭탄 몇 개를 가져왔는데 이미 미국의원단은 경성을 떠난 뒤였다. 그러나 9월 1일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경찰서 현관을 파괴하였으며, 그 자리에서 조선인 관리들의 사직과 재산가들의 독립운동자금 원조를 요구하는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을 뿌리고 도주하였다.
또 그들 중 한 사람은 같은 시각에 선천군청 토지대장창고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다. 그해 9월 7일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1921년 4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이 언도되자 이에 불복, 경성고등법원에서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그해 9월 평양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