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6월 3일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석정리에서 태어나 충청북도 청주군 북일면 외평리 67번지에서 거주하였다. 1900년 전후로 서울에 진출하여 가야금병창으로 이름을 얻었다. 일제강점기 청주에서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간혹 공연에 참여하기도 하다가 1940년 또는 해방 직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928년 풍류랑(風流郞)은 『별건곤(別乾坤)』에 실린 「조선 고악의 변천과 역대 악단의 명인물」이라는 기사에서 가야금의 명인으로 심정순과 더불어 박팔괘를 꼽았다.
박팔괘가 1910년 이전부터 미국 빅타(VICTOR) 유성기음반에 「새타령」, 「자진산타령」, 「토끼화상」 등의 가야금병창을 취입한 것을 보면, 이미 장안의 인기를 얻었던 명인임을 알 수 있다. 1914년 『매일신보(每日申報)』의 「예단일백인(91) 리화(梨花)」에 따르면, 1914년에 박팔괘가 박리화를 데리고 서울로 상경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1914년 이후 박팔괘는 단성사를 중심으로 판소리의 이동백, 잡가의 채란과 함께 한 해 동안 공연을 이어 나갔다. 이때 가야금병창 「춘향가」, 「선소리」, 「새타령」, 「성주푸리」, 「만세가」 등을 연주하였다. 1915년에는 조선구파배우조합(朝鮮舊派俳優組合) 평의원으로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紀念朝鮮物産共進會)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미국 빅타에서 2차로 유성기음반 「단가」를 취입하였다. 이 시기 박팔괘는 함선생 및 채란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건 ‘박팔괘 일행’으로 지방 흥행을 이어 나갔다.
1915년 이후로 몇몇 무대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박팔괘의 공연 활동은 뜸해졌다. 1927년에 조선일보 충주 지국에서 개최한 독자위안가극회에 지동근, 백점봉, 정해시와 함께 무대에 올랐고, 1930년에는 청주에 이동백 일행 협률사가 온 것을 기념하는 동아일보 독자위안명창대회에 참여하였다. 1935년에는 청주에서 진행된 도농촌진흥위원좌담회(道農村振興委員座談會)에 가미된 연예에 청주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출연하였다.
서울과 청주 지역에서 제자를 양성하였는데, 서울에서는 이일선(李日善)과 박상근(朴相根), 청주에서는 이창수, 이계순이 학습하였다고 한다. 또 청주 권번(券番)에서 제자를 지도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