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백원(百源), 호는 진천(眞川). 할아버지는 박세필(朴世弼)이고, 아버지는 교위(校尉) 박정(朴淨)이며, 어머니는 생원 채응상(蔡應祥)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3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의 정자(正字)·홍문관박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6년 시폐(時弊)에 대하여 통렬한 어조로 소를 올려, 신흠(申欽)으로부터 임진왜란 이후 제일가는 진언(陳言)이라는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명나라 유격(游擊) 마정문(馬呈文)의 접반관(接伴官)으로 영남에 다녀왔고, 이듬해 경기도관찰사 한준겸(韓浚謙)의 종사관이 되었다가 이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과 공조·병조·예조의 좌랑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그러나 1596년에 올린 소의 내용이 말썽이 되어 외직으로 나가게 되어 연서도찰방(延曙道察訪)·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대동도찰방 등을 거쳐, 선산부사가 되어서 선정을 베풀었다. 1612년(광해군 4)에 단천군수가 되어서도 포상을 받고 선정비가 세워졌다. 엄격한 성격에 책임감이 강하였고, 평소 김상헌(金尙憲)·조정호(趙廷虎) 등과 친교가 있었다. 사부(詞賦)에도 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