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제국대학 법과 학생인 신현중(愼弦重)은 학우 조규찬(曺圭瓚) 및 일본인 학생 3명과 함께 서울 관훈동의 중화원(中華園)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1929년 이래 활동하던 이 대학 재학생 중심의 독서회 소속 학생을 포섭, 반제부(反帝部)의 결성을 합의하였다.
그 뒤 1931년 3월부터 경성제국대학 법과 재학생을 주축으로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제이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고등학교)·경신학교(儆新學校 : 지금의 경신고등학교)·경성법학전문학교·기독교청년학관 등에 조직 공작을 전개하여 4월에 반제부, 즉 반제경성도시학생연합회를 결성하였다.
뒤에 반제경성도시학생협의회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본부를 서울 내자동에 있는 신현중의 집에 두었는데 회원은 모두 50명이었다. 신현중의 조직적인 지도로 이형원(李亨遠)과 안복산(安福山) 등이 산하에 소단체를 만들어 이중적인 활동의 효과를 거두었다.
동시에 출판노동조합을 지도하면서 지하 출판물로 성대독서회뉴스, 반제학생신문, 기타 반전격문을 인쇄, 살포하여 반전 투쟁의식을 고취하였다. 또한, 협의회의 별동대 임무를 수행한 적우회(赤友會)는 사회주의운동을 그 실천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조직되어 활동한 지 5개월 만인 1931년 9월 27일 회원 대부분 검거되면서, 반제반전운동은 종결되었다. 그 중 19명이 예심 종결 4개월 만인 1932년 7월 4일부터 공판이 시작되어 그해 11월 4일 언도 공판이 있었다. 주동 인물인 신현중은 징역 3년, 이형원과 안복산은 각기 징역 2년, 나머지 16명은 3년간 집행 유예 판결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