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수원(水原). 별명은 백남신(白南信)·백영근(白永根). 경상북도 영일 출신. 백상목(白相穆)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만년(崔晩年)이다.
1906년 3월 정환직(鄭煥直)의 명으로 정용기(鄭鏞基)가 영천에서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己)·손영각(孫永珏) 등과 의병을 일으켜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을 구성하였을 때 그 휘하에 들어가 우포장(右砲將)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계획이 실행되기에 앞서 의병장 정용기가 관군에 붙잡히자 청하와 경주 등지를 공격하는 등 소극적인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뒤 정용기가 출옥하여 1907년 4월 다시 산남의진을 형성할 때 소포장을 맡아 영덕에서 적군 수십명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그해 9월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의병장 정용기가 순국한 뒤 정환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좌익장(左翼將)에 임명되어 영덕에 두 차례 잠입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뒤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여 1908년 7월 청하군 죽남면의 김재정(金載貞)에게 군자금을 강요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1년 7월에 일제에 의해 소위 강도 살인 및 구타 등의 죄로 대구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8년 9월 만기출옥한 뒤 일본경찰의 감시하에서도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