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유함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이조정랑, 예조정랑, 황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중열(仲說)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46년(명종 1)
사망 연도
1618년(광해군 10)
본관
수원(水原)
주요 관직
승문원주서|병조정랑|이조정랑|에조정랑|황주목사
관련 사건
임진왜란|정유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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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에, 이조정랑, 예조정랑, 황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중열(仲說). 참교(參校) 백사수(白思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왕자사부(王子師傅) 백익견(白益堅)이고, 아버지는 백인걸(白仁傑)이다. 어머니는 안찬(安璨)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0년(선조 3)에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1576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해에 승문원주서(承文院注書)에 등용되고, 이어서 홍문관의 정자(正字)·박사·부수찬(副修撰)·지제교(知製敎)를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다. 1583년에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584년에 이조정랑이 되었다.

당쟁을 중재하던 이이(李珥)가 죽자 당쟁을 피해 벼슬을 버리고 용안(龍安: 龍仁)의 농장에 내려가, 그 곳에 있는 백운암(白雲庵)에서 교학(敎學)에 힘쓰기도 하였다. 1589년에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이 평정되자 다시 예조정랑으로 복직되었다.

헌납이 된 후, 역적 정여립 등과 사귄 사헌부·사간원의 요직 인물들을 갈아치우도록 소를 올려 시행되었다. 다시 이조정랑을 거쳐 의정부의 검상(檢詳)·사인(舍人)이 되었다. 1591년 왕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西人)인 정철(鄭澈)의 주장에 동조했는데, 이후 정철이 물러나자 백유함도 경성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경흥으로 옮겨졌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가 풀려 의주로 왕을 호종(扈從)했으며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으로 복직되었다. 명나라 군사들의 군량을 조달하라는 특수 임무를 부여받고 동분서주하면서 윤승훈(尹承勳)과 함께 군량미 2만 석을 조달했고, 이어서 정주에서도 많은 군량미를 모았다.

그 해 10월에 성균관사성이 되어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겸직하였다. 1593년 함경도에서 왕자를 왜군에게 잡히게 한 황정욱(黃廷彧)을 탄핵하였다. 1594년에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황주목사로 나가 도탄에 빠진 백성을 잘 어루만져 치적을 남겼다. 1596년에 우리 나라의 실정을 설명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호군(護軍)이 되어 명나라 사신인 정응태(丁應泰)를 접반하였다. 그런데 정응태는 접대가 소홀함을 난문하면서 조선이 한낱 왕국에 불과한데,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묘호(廟號)를 사용하는 것은 황제를 능멸하는 행위가 아니냐고 트집을 잡았다. 이에 대해 백유함은 조선왕의 묘호는 국초부터 당당히 사용해온 것임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백유함은 정응태에게 『해동기략(海東記略)』을 건네주어 문제를 유발한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국문을 받고 1599년(선조 32) 부안(扶安)으로 유배되었다. 1602년 백유함은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복직하지 못하고, 여생을 용안과 개성에서 보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신독재선생유고(愼獨齋先生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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