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집은 아집 외에 일체 사물이 각기 고유한 본체와 성격을 갖는다는 생각에서 생겨나는 집착을 의미하는 불교 교리이다. 아집과 함께 이집으로 불린다. 마음 밖에 대상이 존재한다는 견해 자체를 집착이라고 보는 해석이다.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근원적 존재는 실재한다고 보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이같은 사유를 법에 대한 집착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법집의 내용은 알아야 할 바, 인식대상에 대한 장애이며, 그 장애의 내용은 더렵혀지지 않은 무지이다. 대승불교의 일반적 교리에서는 보살이 되어야 법집을 끊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법집은 범어로 dharma-grāha이며, 주1과 함께 주2이라고 한다. 마음 밖에 대상이 존재한다는 견해 자체를 집착이라고 보는 해석이다. 아비달마불교에서는 오온의 화합에 의해 형성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즉 주3이다. 하지만 자아를 형성하는 구성요소인 눈, 귀, 코, 혀, 몸의 근원적 존재는 실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이와같은 사유를 부정하고 이것을 법에 대한 집착이라고 규정한다. 그것이 법집이다.
바바비베카(Bhāvaviveka, 淸辯, 490?~570?)에 따르면 법집을 끊으면 주4를 증득하게 된다. 법집의 내용의 알아야할 바인 소지, 즉 인식대상에 대한 장애이며, 그 장애의 내용은 더럽혀지지 않은 무지(無知)라고 설명된다. 즉 법집은 줄여서 무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주5을 소멸시키고 나서 수행의 경지가 높아진 후에 법집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여기에는 상반되는 주장이 있다. 우선, 중론에 대한 주석인 무외주(無畏註)에서는 인무아의 실상을 관찰하여 그 집착의 결과인 번뇌장을 제거하고 유여열반에 이르며, 법무아의 실상을 관찰하여 그 집착의 결과인 소지장을 제거하고 무여열반에 이른다고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바비베카 역시 인무아에서 출발하여 법무아로 향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찬드라끼르티(Candrakirti, 月稱, 600?-650?)는 이와 반대로 법집을 끊고 나서 인집을 끊는다고 하였다. 이렇게되면 단순히 인집, 아집의 순서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보통은, 성문은 인집만을 끊을 수 있고 보살이 되어야 법집을 끊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일반적인 순서 및 인식과 차이가 생기게 된다. 찬드라끼르티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법집은 더럽혀진 무지이다. 이렇게되어도 여전히 성문과 보살의 동일성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생기지만, 십지의 제7지 단계에서 보살의 비원의 공덕에 의해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이 찬드라끼르티의 설명이다.
원효는 이장의에서 법집이 있는 한 생사를 반복하게 되며, 다만 이 법집을 끊지 못했더라도 번뇌장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즉 법집은 소지장에 있는 번뇌이면서 지혜의 성품이 현전하여 관찰하는 것을 막을 뿐, 번뇌장과는 무관함을 말하는 것이다. 인집과 대비적으로 사용되는 법집에 대해서, 원효는 인집이 있다고 해도 무상보리의 증득이 가능하며, 법집이 있다고 해도 이승의 열반은 가능하다고 하였다. 즉 보살은 인집이 있어도 무상보리를 얻을 수 있고, 이승은 법집이 있는 채로 번뇌 즉 인집만을 제거하여 열반에 든다는 것이 된다. 원효는 번뇌장에는 법집이 없음을 여러 곳에서 강조하며, 소지장에서 법집이 가장 두드러진다고 하였다. 법집의 내용은 망상분별 및 법에 대한 애착, 오만 무명 등이다. 이 법집은 눈, 코, 입, 귀, 몸에는 없다. 원효는 열반경을 인용하여 변계소집하는 것은 의식의 담당이기 때문이라고 풀이하였다. 즉 법집의 주체는 제6식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