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취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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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지리
개념
인접 국가와의 접경지대 또는 새롭게 개척되는 곳에 형성된 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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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인접 국가와의 접경지대 또는 새롭게 개척되는 곳에 형성된 취락.
개설

위치상의 외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전초지는 주권이 미치는 최전방이기 때문에 인접 국가와의 세력충돌 가능성을 항상 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취락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방어력의 구축, 곧 군사적 기능을 지닌다. 취락은 국토의 중심 지역에서 먼 국경지대에 입지하며 강·산맥·해안 등의 선을 따라 발달한다. 기지촌(基地村)의 성격을 띠므로 방호소에는 장기적인 군사시설로서 성곽·진무청·병기고 등을 설치하고, 수비를 담당하는 영리(營吏)와 군졸이 상주하였다.

변경 취락은 지역적 개념이 강하며 특히 국토의 핵심적 지역에 대하여 경제적·문화적으로 그 주변의 저개발된 취락을 의미하기도 한다. 변경 취락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국방상의 요충지에 주로 형성되었으며, 내륙이나 해안에서는 탐험과 개척, 자원 개발의 필요성 등에 의해 군사적 기능을 보유하지 않은 채로 형성되기도 하였다. 즉 형성 배경이나 그 목적에 따라 변경 취락의 성격은 상이하다. 그 결과 취락의 입지 장소에 따라 문화 경관 및 주민 분포에 이질적인 요소가 나타나기도 하며, 경관상의 차이가 발생하기도 한다.

내용

북진정책을 앞세웠던 고려 때에는 정주 중심의 청천강 유역의 서계(西界), 영흥, 안변 중심의 동한만 일대의 동계(東界) 등 이른바 양계가 북쪽 변경이 되었다. 이곳은 여진과 거란족과의 접경지대로 항상 세력 충돌의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서계의 정주·운산·희천과 동계의 안변·고원·영흥 등지에는 외적 방어를 위한 요새지를 구축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면 “서북으로부터 거란·대금(大金)의 접경에 이르기까지 보루와 참호가 있고, 그 동남쪽은 해안에 닿았는데 섬에도 설치한 것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보루는 흙이나 돌로 쌓은 성곽을 의미하고, 참호는 성곽 밖으로 파놓은 구덩이라고 해석할 때, 이들은 외적 방어와 군사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설물이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목책(木柵)으로 대신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주위에서 나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삼림이 울창한 환경에서만 가능하다.

근세 사회에 들어와 영토의 범위가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르렀던 관계로 취락도 북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의 집중 분포지는 양계를 대신한 육진(六鎭), 즉 경성·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 등이다. 이곳은 여진족의 세력을 몰아내고 우리의 영토로 확정된 곳이기에 그들이 반격해 올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육진에는 성곽을 구축하고 상비군을 주둔시켜 외적 방어에 만전을 기하였으므로, 이 취락은 접경지대의 위치적 성격과 동시에 기능상으로 군사적 요새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양성지가 오경설치론(五京設置論)을 주장하였는데, 여기에서 5경은 압록 강변의 국방상 요충지이자 변방지역 개발거점으로 거론되었다. 이러한 중심지 역시 변경 취락의 유형에 포함시킬 수 있겠다.

한편 변경 취락은 해양세력과의 접경지대에도 나타난다. 우리나라와 같이 반도국인 경우 영토의 범위가 반도와 도서지방을 포괄하므로, 도서지방은 해양세력과 접경을 이루는 변방이 된다. 이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한 제주도는 해양세력인 일본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일본인의 노략질이 고려 말엽부터 빈번히 일어났다. 이에 제주도에는 조천·애월·서귀 등지에 방호소(防護所)를 두고 외적을 방어하였다.

한편 변경지역은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은 상황에서 오는 피해도 적지 않았다. 제주도의 경우 중심 세력이 못 미치거나 혼란한 틈을 타서 지방의 토호 가운데 강포자(强暴者)는 평민을 부리거나 토지를 빼앗았다. 이의 해결책으로 돌담을 쌓고 이것에 의한 소유경계를 명확히 했다. 오늘날에 볼 수 있는 돌담 경관은 이때부터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천재지변시에는 식량과 약품을 보내 구제하려 하나 이를 실은 배가 바람으로 지연되었다. ‘굶어죽은 사람이 수천이 되었고 마을은 비었다.’고 숙종이 만든 제주 아사인(餓死人)을 위한 위령제문에서 당시의 참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변경 취락은 경제생활의 안정을 찾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활동양식이 기존 취락과 다른 점이 많다. 우선 토지는 척박한 토양을 개간한 것이기에 노력의 대가보다 수확이 적다. 더욱이 개간활동은 화전농업의 형태로 이루어지므로 곤궁을 면할 길이 없었다. 또한 산림경제의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여기에 변경 취락은 접경지대에 위치하여 외적방어의 기능을 안고 있을 뿐 아니라 개척 연변의 성격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변경 취락은 남북세력의 접경지대인 휴전선 근방의 취락과, 수평적 혹은 수직적인 개척 연변에 위치한 태백산지의 취락으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태백산지는 자연을 이용한 거주공간의 확장과 관련된 변경 취락이라는 점에서 지리학적 의의가 크다. 화전농업의 초기적 상황을 거쳐 정착 단계에 들어간 태백산지의 취락은 높이에 따라 자연적 제약이 다르므로 적응의 양식도 이에 따라 달라진다.

높이가 높아짐에 따라 주민의 생업 기반도 농업→목축업→임산업으로 바뀐다. 그것은 산악지형의 효율적 이용을 전제로 한 생업활동의 적정 분화를 뜻한다. 더욱이 산악지형은 평탄지가 한정되어 있고, 기후의 수직적 변화가 크다. 그리하여 현재 500∼700m 높이의 산촌에서는 4∼10월에 걸치는 단기 작물로 옥수수·메밀·감자·배추 등이 선택적으로 재배된다.

이 중 배추는 단기간에 이기작(二期昨)이 가능하여 오늘날 고랭지 채소의 주산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고랭지 채소의 재배는 농가수입을 올리는 계기가 되었고, 여기에 목축·약초 재배 등 다각적 영농을 영위함으로써 지척민빈(地瘠民貧: 땅이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함)의 대명사로 불려왔던 변경 취락의 성격을 긍정적으로 바꾸어가고 있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취락지리학』(오홍석, 교학사, 1980)
『국역고려도경』(민족문화추진회, 1977)
『제주도의 취낙에 관한 연구』(오홍석, 창음사, 1974)
「태백산지의 산촌 연구」(오홍석, 『지리학연구』 9,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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