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별서(別墅)·별저(別邸)·별업(別業)·별제(別第) 등으로 불렀으며, 주인의 식견에 따라 집에 당(堂)·정(亭)·재(齋)·와(窩)·정사(精舍)·여(廬)·전(廛)·암(庵) 등의 글자를 넣어서 당호(堂號)를 짓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초엽에는 한강가에 이름난 정자나 당우(堂宇)들이 요소마다 있었다. 낙천정(樂天亭)·칠덕정(七德亭)·망원정(望遠亭)·압구정(鴨鷗亭)·희우정(喜雨亭)·제천정(齊川亭)·화양정(華陽亭)·황화정(皇華亭)·영복정(榮福亭)·효사정(孝思亭)·침류당(枕流堂) 등이 특히 유명하였다.
이 가운데에 낙천정은 태종의 별궁이었고, 영복정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별서, 효사정은 노한(盧閈)의 별서, 침류당은 이사준(李師準)의 별서이었다. 권반(權攀)의 별서는 한강가에 있는 무진정(無盡亭)이었다.
무진정이란 최항(崔恒)이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시에 나오는 “天慳異境屬豪雄 無盡寄觀盡漢東”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다. 무진정은 광주목(廣州牧)에 속하는 고장에 있었다. 심정(沈貞)의 별서인 소요당(逍遙堂)은 양천현(陽川縣)에 자리잡고 있었다. 한강가에서 벗어난 내륙에 경영된 별서이다.
안부윤(安府尹)의 별서는 서원(瑞原)에 있었는데 깊은 곳에 있는 한적한 고장에 자리잡았다. 귀양간 자리에 짓고 살던 집도, 따로 짓고 살았다는 점에서 별서류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규보(李奎報)가 부평 땅에 짓고 살던 자오당(自娛堂)이나 김구용(金九容)이 여주고을에서 귀양살 때 짓고 살던 육우당(六友堂) 등이 이에 속한다.
노한의 효사정은 노량진 남쪽 언덕 위에 있었다. 강희맹(姜希孟)이 찾아가 살펴보고 쓴 기록에 따르면 노한의 선영 옆 경치 좋은 곳에 집을 지었고, 언덕 위에 따로 정자를 지어 효사정이라 부르더라고 하였다. 이천 땅에 김좌근(金佐根)의 묘역이 있는데 여기에도 묘막(墓幕)이라고 할 집이 한 채 경영되어 있다.
효사정의 유례를 따른다면 일종의 별서라고도 할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행랑채까지가 구비되어 번듯하게 이룩되어 있다. 규모도 크고 장중하게 지어서 주변을 압도하고 있다. 집과 정자를 갖추어 지은 예는 적지 않다. 현존하는 시골의 이름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집과 정자를 구비하고 있다.
정자는 집의 경내에 짓기도 하지만 강 건너 경치 좋은 자리에 따로 짓기도 한다. 이것도 별서의 일종이라 하겠다. 현존하는 이러한 유형들의 별서 건물은 규모와 모양이 제각각이다. 이는 주인의 성정(性情)에 따라 각각 특색 있게 구조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별장은 조선시대의 별서보다 더 먼 곳에 조성된다.
즉, 조선시대의 별서는 살림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경치 좋은 곳에 조성되어 살림집과의 유대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면 현대의 별장은 독립성이 강하다. 이것은 생활 활동 범위의 확대와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