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대전』에 따르면, 교서관(校書館)에 2인, 상의원(尙衣院)에 1인, 군기시(軍器寺)에 1인, 예빈시(禮賓寺)에 3인,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에 6인, 전설사(典設司)에 2인, 전함사(典艦司)·전연사(典涓司)·내수사(內需司)·빙고(氷庫) 등에 각각 1인을 두어 모두 19인으로 되어 있었다.
비록 녹봉을 받지는 못했지만, 동반실직(東班實職)에 속했기 때문에 일정한 기간 즉 360일을 근무하면 다른 관직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정직3품 이하관과 마찬가지로 제수된 뒤에 대간에 이문(移文 : 동등한 관서 사이에 주고받는 문서 또는 문서를 보냄.)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 다른 관직에 옮겨갈 경우에는 전사(前仕 : 벼슬을 그만 둔 사람이 다시 벼슬할 경우 그 전의 관직에 근무한 일수)를 통산해주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별좌와 같은 무록관은 녹봉을 절약하고 공신이나 음서자제가 벼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정직 녹관 만큼의 대우는 받지 못하였다.
특히 정직참상녹관은 3∼4년만 근무해도 1급을 올려주었는데, 무록관은 6∼7년을 근무해도 승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별좌는 1382년(우왕 8)에 “절급도감(折給都監)을 설치해 재추(宰樞) 7, 8인으로서 별좌를 삼았다.”고 하는 것’이 처음 보이는 기록인데, 1116년(예종 1) 보문각에 처음 설치한 제거(提擧)와 함께 중국의 송대부터 쓰이기 시작하다가 고려에 도입된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에 들어와 1401년(태종 1) 9월에 헌사(憲司)가 판봉상시사 김한로(金漢老)를 청죄할 때, 의순고별좌(義順庫別坐)로 있을 때의 잘못을 거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별좌는 제거 등 다른 무록관과 마찬가지로 격이 떨어지는 당하관의 관아에만 설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