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칸 반의 남향 기와 건물로, 당내의 정면에 세조대왕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세조가 죽은 뒤 신령으로 모셔진 것으로 우리나라 무(巫)에서는 군왕신(君王神)의 성격을 띤다. 영정은 세조가 곤룡포를 입고 용상에 앉았으며, 앞의 좌우에 문무관이 시위한 무신도(巫神圖)의 형태를 취하였다.
무의 신령으로 숭배된 배경은 막연하지만 세조대왕신이 주신(主神)으로 모셔져 있고 동제(洞祭) 때 받들어지는 것으로 그 유래와 성격을 알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18세기 후반 그 동네에 손복개(孫福介)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어느 날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앞집의 곁에 있는 느티나무 위에 한 폭의 영정이 걸려 있다. 그것이 세조대왕의 진영(眞影)이니 그것을 촌민과 함께 봉안하여 모시면 집안과 마을이 두루 평안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였다.
다음날 그는 나무 위의 영정을 확인하고 이내 마을 사람과 상의하여 당(堂)을 세워 그를 봉안하였다. 그 뒤부터 해마다 봄·여름·가을 세 번 제사를 드렸는데, 일제시대까지 계속되었다.
동제는 유교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조선 말까지는 제관이 열 명이 넘는 대규모의 의식이었으나 일제시대에는 5∼6명으로 규모가 줄어들었다. 동제의 끝에는 제비(祭費)를 갹출한 집마다 축원의 의미로 한 장씩 소지(燒紙)를 행하였다.
세조대왕신의 신앙 분포지역은 경기지역의 몇 곳에 제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부분의 군왕신이 그러하듯이 세조대왕신은 조선왕조의 몰락과 함께,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겪으면서 무(巫)의 신앙 대상에서 소외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