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물(天然物) 중에 특히 약용(藥用)으로 쓰이는 식물의 전초(全草)·근(根)·목(木)·피(皮)·과실(果實)·종자(種子) 등은 좁은 의미의 본초라고 한다. 그러나 동물·광물의 천연산물도 여기에 포함시키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본초는 자연과학의 모체로서 주로 의료(醫療)의 약물을 논하는 학문으로 발달되어 왔다. 이는 우리 나라에서도 인류의 문화발달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원시약물과 의술이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선인(先人)들은 의·식·주를 자연에서 얻었으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생과 사의 이치를 점차 터득함으로써 생명의 신비성을 알게 되었고, 그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끈질긴 투쟁을 반복하면서 질병과 싸워 왔을 것이다.
본초의 발달은 실제의 경험을 통해 자연물의 초근목피류 중에서 식용할 수 있는 것과 사람의 생명을 탈취해 가는 유독식물(有毒植物)과 질병을 치료하는 약용식물 등을 계통적으로 구분하여 응용이 되어 왔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인류의 초창기에는 자연에서 생육하고 있는 독초를 잘못 이용하여 많은 인명이 손상되었을 것이며, 그로 인하여 약으로 쓰이는 본초는 효험을 통하여 원시적인 지식이 증가하여 다소나마 약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을 것이다. 약초에 대한 터득은 남자보다 여자가 먼저라는 설은, 여자는 아이를 낳음으로써 여러 가지의 병을 체험하였으며 더욱 약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생겨났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약초를 이용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유사≫에 환웅(桓雄)이 곰[熊]과 호랑이[虎]를 인신화(人身化)하기 위하여 효험이 있는 쑥[靈艾] 일주(一炷)와 마늘[蒜] 20매(二十枚)를 먹으라고 한 내용은 쑥과 마늘이 곰과 호랑이를 인신화하기 위한 약재로 쓰인 것으로 생각된다.
또 고려 말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帝王韻紀≫에 음약성인신(飮藥成人身)이라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으며,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음약성인신으로 하여 ‘艾’와 ‘蒜’이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쑥이나 부추류는 식용 이외에도 약용으로 활용된 것만은 사실이다. 여기에서 산은 지금의 마늘과는 다르며, 실제 당시의 산으로 기재된 것은 ≪신농본초경 神農本草經≫의 중품(中品)에 수재된 해(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해는 소근산(小根蒜) 또는 해백(薤白)·야산(野蒜)·소산(小蒜)으로 부르고 있어 그 기원은 돌달래·해로 볼 수도 있고, 또는 산마늘[山葱, 茖葱]·산달래·산부추·참산부추·산파[火葱, 細葱, 細香葱]·달래 등을 들 수도 있다. 이들 식물은 현재에도 식용 또는 약용하고 있으며, 우리 나라 전역에 자생하고 있다.
특히 야생산의 마늘속 식물의 인경(鱗莖)은 지금도 외상(外傷)·금창(金瘡)·안태(安胎)·해독·감기·두통·정설(精泄)·불장생약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서 애는 분명히 쑥을 가리키는 것으로 ≪신농본초경≫ 하품(下品)에 수재된 초호(草蒿)와는 다른 것 같으며, 애라고 지적한 것은 지금의 쑥 또는 황해쑥·참쑥을 가리키는 것 같고 어느 지역에서나 손쉽게 채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쑥은 우리 나라에서 오랜 기간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뜸쑥을 만들어 해당하는 경락(經絡)·경혈(經穴)에 자극하여 백병(百病)을 고친다고 하며, 특히 애의 잎과 줄기는 민간요법으로는 지혈(止血)·토혈(吐血)·부인병·육혈(衄血)·안태(安胎)·복통(腹痛)·임신하혈(姙娠下血) 등에 사용하며, 신선한 애의 전초는 즙을 만들어 외상출혈에 쓰인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에서는 애와 산을 최초의 약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이며,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농본초경≫에도 유사약초를 기입한 것으로 보아, 우리 나라의 민간약초의 발달은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전통적인 약물로 발전시켜 왔고, 지금도 이 두 가지 약초를 폭넓게 사용하고 있어 우리 민족이 발견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중의 하나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기원전 108년까지는 본능적 의료(本能的醫療)에서 무주적 의료(巫呪的醫療)를 행하면서 차츰 오랜 경험에 의한 초목본류(草木本類)·동물·광물 등을 내복(內服) 또는 외용(外用)으로 첩부(貼付)하고 얻어지는 효능효과에 신비성을 갖게 되었다고 보며 점차 약초에 대한 관심이 달라졌을 것이다.
문제는 정확한 문자의 기록이 없으므로 본초에 대한 역사 및 기원을 추적하기는 후세에 기록된 문헌을 참고하는 정도이며, ≪신농본초≫의 도입으로 민족의 약물이 발전된 것으로 생각된다.
동양에서 ≪신농본초경≫은 약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 중의 하나이나 그 원전(原典)에 대한 고증은 알 길이 없다.
신농씨(神農氏)에 대하여는 ≪역경 易經≫·≪회남자 淮南子≫·≪수신기 搜神記≫·≪사기 史記≫ 등에 기록된 전설상의 인물로서 처음으로 사람에게 농사짓는 방법과 상업하는 요량을 일깨워 주었고, 자연에서 생육하고 있는 모든 개개 식물·광물에 대하여 몸소 맛을 보고 독성 여부를 판별하여 하루에 1백 가지의 약초의 약효를 결정하였다고 하며, 매일 70회나 약물의 중독을 일으켰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신농은 동양에서 본초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 최고의 약물학서인 ≪신농본초경≫에 그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이 ≪신농본초경≫은 옛날에 산일(散佚)되었으며, 양(梁)나라의 도홍경(陶弘景)이 편찬한 ≪신농본초경집주 神農本草經集註≫ 7권를 증보(增補)시킨 당나라의 ≪신수본초 新修本草≫, 오씨의 ≪신농본초경≫, 송나라의 ≪증류본초 證類本草≫ 등의 역대 본초서의 내용을 통하여 ≪신농본초경≫의 이름이 보존되어 왔고, 그 밖의 다른 의약서적에도 그 자료가 일부 남아 있으며, 현재까지 여러 종류의 복원본이 만들어졌다.
전한(前漢) 말부터 후한(後漢) 말에 완성된 장중경(張仲景)의 한방의 원전(原典)인 ≪상한론 傷寒論≫의 한방 처방도 당시의 ≪신농본초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 의약서적이 모체가 되어 대륙의 본초가 점차 체계화되었다고 본다.
≪신농본초경≫은 약을 3품(三品)으로 나누어 365종류를 열거하여 일 년의 역일수(曆日數)에 상응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상약(上藥) 120종류, 중약(中藥) 120종류, 하약(下藥) 125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상약’은 군(君)이 되며 주로 사람의 생명을 북돋워주고 천(天)에 응(應)하여 독성이 없어서 다복구복(多服久服)하여도 인체에 해(害)를 주지 않으며 부작용이 없는 생약으로 이루어져 있고 경신(輕身)·익기(益氣)·불로연년(不老延年)한다.
다시 말하면 인체 내에 여분의 축적된 지방이나 요산 등을 제거하여 주는 생리기능을 원활히 하여 주고 몸의 활동을 가볍게 하여 주며 정신상태를 깨끗하게 하고 인간의 수명을 좀 더 연장시켜 준다.
‘중약’은 신(臣)이 되며, 주로 성(性)은 양(養)하고 있어서 사람에 따라서는 무독 또는 유독의 작용이 있으며 병후에 몸이 허약한 사람을 보(補)하기 위하여 사용하면 원기(元氣)를 돋워 준다.
‘하약’은 모두 좌사(佐使)가 되며 주로 질병 치료 목적으로 쓰이나 독성 생약이 많아 인체에 위해하는 작용이 있어 장기간 계속하여 쓸 수 없는 약이다. 하품의 약들은 오한발열(惡寒發熱) 등의 한열병(寒熱病), 그 밖의 인체에 나쁜 영향을 주는 사기(邪氣)에 의해서 나타나는 병을 없애 주고 적(積)과 취(聚)를 치료하는 약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에서 ≪신농본초경≫이 우리 나라에 도입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유입됨에 따라 본초에 대한 지식이 고조되었고 민간약에만 의존하였던 것을 점차 문헌에 의하여 자국산(自國産)의 약초를 응용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급진적으로 우리 나라 본초의 연구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특히 ≪신농본초경≫ 상약·중약·하약 중에 수재된 것 중에서 우리 나라에 야생하는 약용동물·식물·광물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상약에 속하는 식물성 생약으로는 창포(菖蒲)·국화(菊花)·인삼(人蔘)·창출(蒼朮:껍질 벗긴 것은 白朮)·토사자(菟絲子)·우슬(牛膝)·독활(獨活)·차전자(車前子)·택사(澤瀉)·원지(遠志)·용담(龍膽)·세신(細辛)·석곡(石斛)·권백(卷柏)·방풍(防風)·포황(蒲黃)·속단(續斷)·오미자(五味子)·사상자(蛇床子)·인진호(茵蔯蒿)·사삼(沙蔘)·송지(松脂)·왕불유행(王不留行)·복령(茯苓) 등이다.
광물성 생약으로는 단사(丹砂)·운모(雲母)·석종유(石鍾乳)·자석영(磁石英)·활석(滑石) 등이며, 동물성 생약은 사향(麝香)·웅담(熊膽)·아교(阿膠)·석밀(石蜜)·상표초(桑螵蛸) 등이다.
중약에 속하는 식물성 생약은 갈근(葛根)·과루근(栝樓根)·고삼(苦蔘)·시호(柴胡)·현삼(玄蔘)·진교(秦艽)·지모(知母)·백지(白芷)·음양곽(淫羊藿)·황금(黃芩)·천초(茜草)·패장(敗醬)·백선(白鮮)·고본(藁本)·지유(地楡)·후박(厚朴)·진피(秦皮)·오가피(五加皮) 등이며, 광물성 생약은 웅황(雄黃)·자석(磁石)·석고(石膏) 등이 있고, 동물성 생약은 노봉방(露蜂房)이다.
하약에 속하는 식물성 생약은 반하(半夏)·길경(桔梗:도라지)·대황(大黃:단 白頭山 野生品은 王大黃이다)·하고초(夏枯草) 등이며, 동물성 생약은 오공(蜈蚣:지네)·수질(水蛭:거머리)·제조(蠐螬:굼벵이) 등이다.
≪신농본초경≫의 분류를 현대적인 의미에서 해석하여 보면 상약은 보건약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중약은 치료약과 보건약을 겸하며, 하약은 완전한 치료를 할 수 있고, 특히 상약·중약·하약 중 상약을 중요시하여 다루는 것은 중국본초의 특색이며, 그 영향으로 아직도 우리 나라에서는 한약 하면 상약에 속하는 보약(補藥)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의방(醫方)이 당대(唐代)에 채용된 것으로는 752년 당나라의 왕도(王燾)가 지은 ≪외태비요방 外台祕要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의 권18 각기항(脚氣項)의 독기공심수족맥절(毒氣攻心手足脈絶)에는 오수유(吳茱萸)·모과[木瓜]를 사용한다고 하였으며, 처방 출처는 고구려의 노사방(老師方)이라는 점에서 당시의 인접 국가와 밀접한 상호 교류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오수유·모과나무는 중국산으로 고구려에서 각기(脚氣)·요족무력(腰足無力)·제습(除濕) 등에 사용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고구려인이 본초에 대한 지식이 높았고, 백제·신라까지 그 영향이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고구려는 중국의 한민족(漢民族)과 지리적인 여건으로 가장 접촉이 빈번하여 자연적으로 한토문화(漢土文化)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주기도 하였다.
약서(藥書) 중 본초서가 수입된 시기는 고구려 561년(평원왕 3)에 중국 오나라의 지총(知聰)이 약서(藥書)·내외전(內外典)·명당도(明堂圖) 등 164권을 가지고 고구려를 거쳐서, 일본으로 귀화하였다고 한다.
이 때 지총(知聰)에 의하여 고구려에 전해진 본초서는 도홍경의 ≪신농본초경≫ 3권 및 ≪신농본초경집주≫ 7권, ≪명의별록 名醫別錄≫ 3권, ≪신농본초경뇌공집주 神農本草經雷公集註≫, 후한(後漢)화타(華陀)의 제자가 쓴 ≪오보본초 吳普本草≫ 6권, 이당지(李當之)의 ≪본초경≫ 1권, ≪동군약록 桐君藥錄≫ 3권 등이며, 이 밖에도 많은 의약서적이 도입되었다.
이 때부터 고구려는 많은 자국산 야생약초를 본초서를 인용하여 질병 치료에 이용하였고 또 중국과 물물교환이 성행하게 되었다.
양(梁)나라의 도홍경이 편찬한 ≪신농본초경집주≫에 고구려 인삼이 기재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귀중한 기록의 하나이다. 당시 고구려 지방(지금의 만주지역)에 자연생 인삼이 자생하고 있었음과, 오래 전부터 인삼이 소중한 약재로 취급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인삼의 원산지는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동북지역·러시아로 보며, 그 기원 식물명은 다 같이 동일종인 Panax ginseng C.A.Meyer이다.
도홍경의 ≪명의별록≫에는 인삼의 뿌리는 길고 황색이며 방풍(防風) 뿌리와 비슷하고, 맛은 달고 잎은 삼출(三出) 또는 오출(五出)이라 하였으며, 비교적 외부형태학적인 기술을 후세 사람을 위하여 상세히 기록을 하였다. 또한, 중국 황하(黃河)의 북쪽 산시성(山西省) 다싱산맥(大行山脈)으로부터 산출되는 상당산(上黨産) 인삼이 가장 품질이 우수하고, 다음으로 고구려 인삼, 백제 인삼, 신라 인삼 순으로 질이 양호하다고 기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기재법은 중량을 논하였을 뿐 실제 몇 년생 산삼(山蔘)이 가장 효과가 우수하다고 언급하지 않았으며, 동일 종류의 삼이란 기후와 풍토에 의한 어떤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약성의 효과에서는 중국산·한국산·러시아산의 차이는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명의별록≫에 고구려·신라·백제 인삼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인삼은 귀중한 약으로 사용되었고 이웃 나라와의 교역에 큰 몫을 한 약용식물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인삼은 보기약(補氣藥)의 대표적인 생약이며 해를 거듭할수록 그 진가는 날로 높아가고 있다.
백제는 약부(藥部)라는 관부를 두었으며, 또 채약사(採藥師)의 관직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상약(常藥)을 정리하여 체계적인 약초의 감별과 채취·채취시기 등에 대한 전문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본초에 대한 학식이 높은 채약사가 있었던 것은 지리적 입지조건으로 보아 덕유산(德裕山)·남덕유산(南德裕山)·백양산(白羊山)·내장산·계룡산·속리산 등에 많은 생약 자원이 자생하였기에 이 자원을 이용하는 본초의 전문인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특히 ≪신농본초경집주≫에 백제 인삼의 외형은 가늘고 길며 뿌리는 딱딱하고 유백색을 띠는 양종(良種)이라고 수록한 것은 백제 인삼의 우수성을 입증한 것이며, 당시 공품(貢品)으로 토산의 인삼을 중국과 교역하여 백제 약물학(藥物學:天然藥品)의 향상된 발달상을 보여준 것으로 추찰(推察)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시대에 완성된 ≪백제신집방 百濟新集方≫은 일본의 단바(丹波唐賴)가 편술한 ≪의심방 醫心方≫ 중에 폐옹방(肺癰方)과 정종방(丁腫方)을 응용함으로써 백제의 의서가 일본으로 수출된 것으로 보며, 본초의 약물로는 단너삼[黃祇]·산국(山菊) 등이 폐옹에 쓰여졌다.
백제신방은 진(晉)시대에 갈홍(葛洪)의 저서인 ≪주후방 肘後方≫ 6권을 응용한 것으로 보아서 당시 백제에 ≪갈씨주후방 葛氏肘後方≫이 도입됨으로써 어느 정도 백제의 본초의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원래 신라는 중국과 교통이 불편하여서 왕래가 어려웠고, 북쪽에 고구려, 서쪽에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본초서의 도입이 매우 어려웠고, 신라 고유의 상약(常藥)이 발전되었으리라 본다. 예를 들면, ≪신농본초경집주≫ 또는 ≪신수본초≫에 신라의 약재가 소개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지역적인 조건이 불리하였다고 본다.
그 뒤 739년(성덕왕 12)에 이루어진 진장기(陳藏器)의 ≪본초습유 本草拾遺≫, 이순(李珣)의 ≪해약본초≫에 신라의 약재가 소개된 것으로 보아 삼국 중에 본초의 발전이 약간 늦었다고 본다.
통일신라에 이르러서는 당나라 의학의 영향을 받아서 점차 발달이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채용되었던 본초서로는 ≪신농본초경≫, ≪명의별록≫ 3권, ≪신농본초경집주≫ 7권, ≪신수본초≫ 등이 있는데, 당시 본초경의 모체가 되어서 통일신라의 천연물 발전에 가장 기여한 의약서의 하나이다.
≪의심방≫에 의하여 알려진 ≪신라법사방 新羅法師方≫은 통일신라 때의 고유 의서로서 약을 복용할 때 주문(呪文)과 몸가짐의 자세를 기재하였고, 특히 ≪의심방≫ 권10에는 속수자를 수치(修治)하여 적과 취를 치료한다고 하였다. 현재 이 약은 사하(瀉下)의 목적으로 쓰이나 유독하므로 조심하여 사용하고 있다.
또 ≪신라법사비밀방 新羅法師祕密方≫에는 말벌의 봉소(蜂巢)인 노봉방을 기재하였고, 이는 ≪신농본초경≫에 수록되어 있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요즈음에도 노봉방은 유선염(乳腺炎) 및 피부소양증에 외용제로 쓰기도 하는 동물생약의 하나이다.
사서(四書)기록에 나타나는 약재로는 인삼·우황(牛黃)·백부자(白附子)·형개(荊芥)·박하(薄荷)·용치(龍齒)·다(茶) 등이 있고, 그 밖에도 해송자(海松子:잣나무의 완숙한 종자)·신라양지(新羅羊脂) 등도 진귀한 생약으로 사용된 것 같다. 특히 차나무의 종자는 828년(흥덕왕 3)에 당으로부터 입수되어 지금의 지리산 입구의 저지대에 재배하게 하였는데, 지금은 상당량이 산출되고 있다.
통일신라산 약재로서 본초서인 진장기의 ≪본초습유≫, 진사량(陳士良)의 ≪식성본초 食性本草≫, ≪일화자제가본초 日華子諸家本草≫, ≪개보본초 開寶本草≫ 및 ≪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 ≪삼국사기≫, 일본의 쇼소원약물로 수재된 중요 생약(生藥)은 다음과 같다. 인삼·우황·신라양지·위령선·백부자·남등근·국(菊)·박하·석발·가자·곤포·대엽조·해송자·진자·온눌제(膃肭臍:해구신)·담라(擔羅) 등이다.
삼국시대의 본초에 대하여는 문헌의 빈곤으로 충분한 지견을 얻기가 매우 어렵다. 본초에 관한 것은 중국의 문헌으로부터 당시의 기록에 해당하는 것을 골라서 우리 나라 상대의 단면을 알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면 ≪명의별록≫·≪신농본초경집주≫·≪본초몽전 本草蒙荃≫·≪다경 茶經≫·≪개보본초≫·≪신수본초≫·≪한서 漢書≫ 지리지·≪통전 通典≫·≪산해경 山海經≫·≪후한서 後漢書≫ 등에 수재되어 있는 초목약품·동물생약·금석류(金石類) 등의 응용면(應用面)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정도이다.
삼국시대의 초본 약품식물로는 역시 인삼(主治:肝·心·脾·肺·腎의 氣를 補한다)이 가장 인기가 있어 중국에 잘 알려져 있었고, 그 다음이 중부·북부의 특산인 노랑돌쩌귀[白附子]을 비롯하여 오미자·여여(䕡茹:大戟科에 속하는 大戟, 甘遂類)·족두리풀(細辛)·토사자·관동화(당시는 高句麗産)·곤포·밤·대추·무이(蕪荑:大果楡, Ulmus屬植物의 種子로서 회충·요충 등에 사용함)·황칠 등이다.
동물생약(禽·獸·魚·蟲 포함)으로는 계(鷄)·봉(鳳)·맹조(孟鳥)·우(牛)·저(猪)·마(馬)·호(虎) 등을 비롯하여 오공(蜈蚣) 등이며, 금석류로는 금설(金屑)·은설(銀屑) 등이다. 이 때 고구려는 중국보다 금(金)의 정련법이 훨씬 앞서 있었다고 보며, 특히 광물생약을 약으로 응용할 수 있도록 불순물을 정제하는 방법을 알았다는 것은 우리 나라의 독자적 경험에 의하여 터득된 민족의 유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 초기의 의료제도는 큰 변동이 없었고, 당나라의 문물을 기초로 한 통일신라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중국의 송나라와 접촉을 시작하였다. 당시에 수입된 의서로는 ≪태평성혜방 太平聖惠方≫ 100권과 ≪신의보구방 神醫補救方≫ 1,010권 등을 비롯하여 본초로는 장조린(張朝璘)의 ≪본초강목 本草綱目≫, ≪명의별록≫ 3권, ≪동군약록 桐君藥錄≫ 2권, ≪가우보주신농본초경 嘉祐補註神農本草經≫, ≪본초도경 本草圖經≫, ≪경사증류대관본초 經史證類大觀本草≫ 등이다.
특히 ≪대관본초 大觀本草≫는 ≪본초강목≫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고귀한 원전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동양의 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도입으로 인하여 고려의 본초지식은 점차 중국에 접근하게 되었고 송나라와 약품의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고려에서 송나라에 준 약재로는 인삼을 비롯하여 유황·송자(松子)·향유(香油) 등이며, 받은 약품은 국내에는 자생하지 않는 정향(丁香)·침향(沈香)·목향(木香) 등의 방향성(芳香性) 향약을 비롯하여 희귀한 열대아시아산 서각(犀角)·육두구(肉豆久)·빈랑자(檳榔子)·몰약(沒藥) 등이다.
또 1079년(문종 33) 7월에 보내 온 100품목의 생약은 개개의 산지를 밝혔으므로 그 원식물(原植物)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었고, 자연적으로 국산 약재와 비교할 수 있는 진귀한 표준품이 되었다.
100품목 가운데 우리 나라에 자생하지 않은 생약은 침향·정향·오약·계심·단삼(丹蔘)·부자(附子)·오두(烏頭)·빈랑자·구척(狗脊)·마황(麻黃)·두충(杜冲)·안식향(安息香)·육두구(肉豆久)·육종용(肉蓗蓉) 등이다. 귀한 동물, 광물생약 중 별사품(別賜品)은 우황·사향·용뇌·주사 등이다.
고려의 본초학의 발전은 중기 후반기에서 전통성이 있는 향약에 대하여 차츰 눈을 뜨게 되었고, 이 때부터 자국산 약재로 질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자주적 자각에 따라 당시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 상·중·하 1책을 편찬해 냈다. 그 밖에 김영석(金永錫)의 ≪제중입효방 濟衆立効方≫과 최종준(崔宗峻)의 ≪신집어의촬요방 新集御醫撮要方≫ 2권이 있다.
특히 ≪향약구급방≫에는 향약 180종류가 기재되어 있고, 개개 생약에 대하여 속명·약성·독성여부·채취시기·건조방법 등을 상세히 논하였으므로 이를 응용하는 데 불편이 없었다. 또한 고려 말경에는 향약경험방서로 ≪향약혜민경험방≫·≪삼화자방 三和子方≫·≪향약간이방 鄕藥簡易方≫·≪향약고방≫·≪동인경점방≫ 등이 있으나 이 의서들은 치료에 대한 처방집으로서 활용이 되었다.
고려시대로부터 창의력을 발휘하여 향약(鄕藥:우리 나라 약)이라는 서명을 애용하게 된 이후로 종래에 많이 사용하던 중국산·열대산 약재의 이름을 국산으로 바꾸는 데 노력하였고, 민간에서 폭넓게 계속 사용하여 온 상약, 향약, 경험에 의한 경험방 등 여러 측면에서 자료를 수집하여 자립의 기틀을 정립하였다. 초기에는 ≪향약제생집성방 鄕藥濟生集成方≫을 비롯하여 세종 때의 ≪향약채취월령 鄕藥採取月令≫·≪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세종실록≫ 지리지 등이 있었다.
특히, ≪향약채취월령≫에는 국산 약초 160종류를 기재하였고, 흥미 있는 것은 개개식물에 대하여 향명(鄕名)을 부기하였고, 분류방법은 월별로 되어 있으므로 채취시기를 알 수 있다. 그밖에 약성·약미, 건조방법에 대하여 간단히 기술되어 있어서, 오늘날에도 약용식물학·생약학·본초학·천연물화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업적으로는 국산 약재를 거의 수록한 ≪향약집성방≫이 있다. 이 책에는 약품 702종류를 총망라하였고 아울러 수치(修治)할 수 있는 211종류가 포함되어 있다. 분류방법은 석부(石部)·초부(草部)·목부(木部)·과부(果部) 등으로 하였고, 다시 상품·중품·하품으로 세분하여 응용하기에 매우 편리하게 편술되었다. 개개 생약에 대하여는 약성(藥性)·주치(主治)·이명(異名)·참고문헌이 있어 본초연구에 큰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 중기에는 본초서 이외에도 우리 나라 고유의 처방집이 간행되었고, 그 중에서도 허준의 ≪동의보감≫은 후세에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강명길(姜命吉)의 ≪제중신편≫에는 약성이 인용되어 있어 천연물을 연구하는 데 보탬이 되고 있으며, ≪광제비급≫, 이제마(李濟馬)의 ≪사상의학≫도 민족의 유산으로 오래 응용이 될 것이다.
본초학은 우리 나라 고유의 동양의학으로서 이것이 의학에 미친 영향은 크며, 근대의학·약학의 도입으로 장족의 발전을 하여 왔다. 본초 또는 처방서로서는 ≪향약집성방≫과 ≪동의보감≫·≪제중신편≫·≪방약합편≫ 등이 있는데, 지금도 값지게 활용되고 있어서 민족의서로 자랑할 만하다.
1975년대 이후 중국에서는 과거의 ≪본초강목≫을 최근에 만들어진 중국 한자의 약자(略字)를 이용하여 알기 쉽게 기술하여 본초연구에 도움이 되게끔 하였다. 이 ≪본초강목≫은 1975년 9월 중국인민위생출판사에서 간행하였다. 상책(上冊)과 하책(下冊)으로 구분하여 상책은 서론, 각론 21권까지, 하책은 곡부(谷部) 22권부터 52권에서 끝맺음을 하였다.
상책과 하책은 부도(목판그림)에 이시진의 원도를 고증하여 삽입하고, 그 내용은 각론에서 석명, 집해, 수치(修治), 기미(氣味) 및 독성(毒性) 여부, 주치(主治) 발명, 정오(正誤)에 대하여 잘 표기하였다. 특히 주치는 손쉽게 누구나 해석할 수 있도록 잘 요약하였다.
1988년 5월 간행된 ≪중국본초도록≫은 총 10권으로 칼라판이며 그 내용은 기원, 형태, 분포, 채제(採製), 성분, 성능, 응용, 문헌 순으로 하였다. ≪중국본초도록≫은 약품식물의 기원 구명에 매우 편리한 책이며, 근세의 대작(大作)으로 약품식물 분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근 1993년 4월에 중화약해편찬위원회에 의하여 발간된 ≪중화약해 中華藥海≫ 상책은 중국의 대륙산 생약을 ‘방제학처방’에 직접 응용할 수 있도록 분류방법을 해표약(解表藥, 解表葯)에서 외용약(外用藥, 外用葯)까지 일목요연하게 세별(細別)하였다.
예를 들면 해표약은 미역취·목적·방풍·강활·마황·생강 등, 청열약은 우담·우황·모동청(毛冬靑)·웅담 등, 보익약은 인삼·대추·여정자·감초·영지초·음양곽·녹용·꿀·해삼·호로인·동충하초·태자삼 등을 인용하였다. 중국 근대본초의 역작이라 할 만하다.
광복 후 우리 나라에서 발행된 본초학서로는 한대석(韓大錫)의 ≪본초학≫, 육창수(陸昌洙)·안덕균(安德均)의 ≪현대본초학≫, 신길구(申吉求)의 ≪신씨본초학 申氏本草學≫, 이상인(李尙仁)의 ≪본초학≫, 육창수·이선주(李善宙) 등의 ≪한국본초학 韓國本草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