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정치파동 ()

정치
사건
1952년 5월 25일의 계엄령 선포로부터 같은 해 7월 7일의 제1차 개정헌법 공포에 이르기까지 전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소요사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1952년 5월 25일의 계엄령 선포로부터 같은 해 7월 7일의 제1차 개정헌법 공포에 이르기까지 전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소요사건.
역사적 배경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결과, 무소속이 의원정수의 60%에 해당하는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대한국민당 · 민주국민당 등 기존의 정당들은 원내 소수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원내 세력분포의 재구성은 대통령직의 연임을 노리던 이승만(李承晩)에게 매우 불리한 조건이 형성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은 자신의 세력 기반을 형성하기 위하여 새로운 정당의 조직을 추진하였고, 이와 동시에 1951년 11월 28일 대통령 직선제와 상 · 하 양원제를 골격으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 중 신당, 즉 자유당의 조직운동은 정부측의 개헌안을 둘러싸고 단원제와 대통령 간선제를 지지하는 원내 의원들과 정부 측 개헌안을 지지하는 원외 인사들 사이에 의견이 대립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같은 해 12월 23일 각기 자유당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두 개의 정당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한편 정부 측 개헌안은 1952년 1월 18일 국회에서 표결에 붙여져 찬성 19표, 반대 143표, 기권 1표라는 압도적 표차로 부결되었다.

내용

이러한 사태는 직선제 개헌안을 통하여 대통령 재선을 바라던 이승만은 국회에 대한 통제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비상수단을 강구토록 하였다. 결국 그는 원외 자유당을 내세워 개헌안 부결반대 민중대회를 개최하게 하고, 헌법규정에도 없는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벌였다.

또한 직선제 개헌 지지자들은 지방의회의 구성을 통하여 국회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2년 4월 17일민주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반(反) 이승만 세력은 곽상훈(郭尙勳) 의원 외 122명의 연서로 국회에서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그러자 원외자유당을 비롯한 18개 사회단체가 국회 측의 개헌안에 대하여 개헌안반대전국정당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의원 내각제를 추구하는 국회와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시키려는 정부와의 대립이 전면적 대결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같은 해 4월과 5월에 지방의회 선거가 실시되어 여당인 자유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이에 따라 이승만은 지방의회와 원외 자유당이라는 두가지의 대국회 압력수단을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정부는 4월 20일장택상(張澤相)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였다.

그는 취임과 더불어 ‘개헌안 4개 원칙’을 발표하여 내각 책임제 개헌안 서명 의원들을 포섭, 분열시켰다. 이러한 가운데 내각 책임제 개헌 추진파의 맹장이었던 서민호(徐珉濠) 의원이 서창선이라는 현역 대위를 사살한 사건이 벌어져 정치적 쟁점으로 발전하였다.

국회는 서민호의 살인이 정당방위이고, 구속은 정치적 책략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5월 104일서민호 의원 석방 결의안을 가결하였다. 다른 한편 정부는 같은 날, 부결되었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다소 수정하여 국회에 다시 제출하였다.

5월 19일서민호가 석방되자, 부산시내는 민족자결단 · 백골단 · 땃벌떼 등 각종 정체불명의 단체들의 관제 데모로 극도의 혼란을 맞게 되었다. 이들은 “살인 국회의원 석방한 국회는 해산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정부와 국회 및 대법원청사를 포위, 습격하였다.

이와 더불어 7개 도의회는 국회해산요구를 결의하고, 지방의회대표는 반 민의국회(反民意國會) 해산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임시수도 부산의 분위기가 이처럼 살벌해진 가운데, 이승만은 1952년 5월 25일 0시를 기하여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와 전라남 · 북도 일부지역에 공비소탕이라는 구실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영남지구계엄사령관에 소장 원용덕(元容德)을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언론검열이 실시되는 한편, 25일 밤부터 내각 책임제 개헌 추진 주동 의원의 체포가 진행되어 서민호 등이 구속되었다. 이어 26일에는 국회에 등정하던 국회의원 40여 명이 탄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끌어 헌병대에 연행하였다. 정치자금 유입으로 국제공산당에 관련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계엄과 국회의원 탄압에 직면한 국회는 계엄해제요구결의안 가결과, 구속 의원 즉시석방결의안 가결로 맞섰다. 민주국민당의 사실상 영도자인 부통령 김성수(金性洙)는 5월 29일 대통령 이승만을 비난하면서 국회에 사표를 던졌으나, 이승만은 내무장관 이범석(李範奭)에게 ‘정부혁신위원회사건’을 발표케 하여 한층 더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일부 대학생들이 “반공 반파쇼 민주수호”의 구호와 함께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1952년 6월 20일에는 이시영(李始榮) · 김성수 · 장면(張勉) · 조병옥(趙炳玉) · 김창숙(金昌淑) · 신흥우(申興雨) · 백남훈(白南薰) · 서상일(徐相日) 등 재야 인사 60여 명이 부산시 남포동에 있는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호헌구국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선언대회를 개최하려는 순간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대회가 무참하게 저지당하게 되었다.

한편 국제연합한국위원단은 우리 나라 정부에게 사태진전을 우려하는 성명을 내고, 트루먼(Truman,H.S.) 미국대통령은 각서를 보내왔지만 이는 내정 간섭 여부의 불씨를 더하였을 뿐이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국무총리 장택상은 국회 해산을 협박 수단으로 하면서 발췌개헌을 추진하였다.

1952년 6월 21일 국회에 상정된 발췌개헌안은, 정부가 제출한 대통령 직선제와 상 · 하 양원제에다 국회가 제안한 개헌안 중 국무총리의 요청에 의한 국무위원의 면직과 임명,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결의권 등을 덧붙인 절충안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세가 꺾인 야당에게 어느 정도의 명분을 주자는 것에 불과하였다.

더욱이 6·25기념식상에서 야당인 민국당 소속 국회의원 김시현(金始顯)의 사주를 받은 민국당원 유시태(柳時泰)가 이승만을 저격하려다 총탄 불발로 실패한 암살미수사건이 터지자, 정부와 여당은 야당 배후설을 퍼뜨리며 압박을 강화하기에 이르렀고, 민주국민당 등 야당은 발췌개헌안에 대한 저항을 완전히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발췌개헌안의 추진을 위해서는 개헌결의에 필요한 의원 정족수만이 문제로 남게 되자, 정부는 피신중인 국회 의원에게 신분 보장을 책임지겠다는 등의 조건으로 등원을 호소하고 구속중이던 의원 10명을 석방시키는 등 발췌개헌안의 통과를 서둘렀다.

강제로 연행, 동원되어 연 이틀간이나 국회에 감금되어 있던 야당의원들은 경찰과 군이 국회를 포위하고, 남송학(南松鶴) 의원 등 자유당합동파와 신라회 소장의원들이 출입을 통제하는 가운데 1952년 7월 4일 밤 기립표결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출석 166명, 가 163명, 기권 3명으로 발췌개헌안은 국회를 통과하게 되었다. 정부는 7월 7일 제1차 개정헌법을 공포하였고, 이로써 부산정치파동은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이 개헌에 따라서 정 · 부통령선거법이 새로이 제정되고 이에 의한 선거가 1952년 8월 5일에 실시되어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부산정치파동은 그 뒤 여야 사이의 정치 운영방식을 폭력 대결을 통한 졸렬한 극한대립의 양상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헌정사에서도 평화적 정권교체의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게 만드는 분기점이 되고 말았다.

또한 더 나아가 장기집권을 위한 비합법적인 수단과 방법이 되풀이하여 나타나게 되는 계기를 형성한 것이 바로 부산정치파동이라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한국민족주의의 탐구』(송건호, 한길사, 1977)
『1950년대의 인식』(한길사, 1981)
『분단한국사』(김정원, 동녘, 1985)
『해방정국의 증언』(고영민, 사계절, 1986)
『현대한국정치사』(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한국정치연구』(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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