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행정은 정부조직에 필요한 인적자원을 동원하고 관리하는 행정이다. 신분에 기초한 벌족 본위의 인재등용과 천거제가 주류를 이루던 인사행정은 고려시대에 와서 행정조직의 정비와 더불어 체계화되었다. 과거제도에 의거하여 관리를 등용했고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기관도 별도로 운영했다. 조선시대에는 인사행정에 관한 세부적인 법률까지 완비하고, 인사행정의 공정성과 신중성을 기하기 위한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졌다. 현재 우리나라의 인사행정제도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바탕으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신분보장, 절충적인 실적주의 원칙을 취하고 있다.
고대 부족국가시대에는 정부조직의 형성이 미약하여 인사행정을 논하기는 불충분하다. 그러나 부족연맹체였던 부여(扶餘)의 경우, 가(加)라고 불리던 부족장 중에서 가장 유력한 자는 우가(牛加) · 마가(馬加) · 저가(猪加) · 구가(狗加) 등의 가축명을 본딴 이름을 붙여서 불렸다.
이들은 각기 중앙의 장관인 동시에 사출도(四出道)의 행정구역을 하나씩 관장하는 지방장관이면서 또한 유사시에는 군지휘관으로서 구실을 맡았다. 이들 대가(大加)는 왕(王)과 마찬가지로 대사(大使) · 대사자(大使者) · 사자(使者) 등의 가신(家臣)을 갖고 있었다.
부족국가가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여 고대국가로 발전하여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삼국시대가 전개되었다. 고구려의 경우 태조왕 때부터 국가 기반이 확립되어 상가(相加) · 대로(對盧) · 패자(沛者) · 고추가(古雛加) 등의 관직을 두었으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의 고구려 최전성기 이후에는 관제의 규모가 커지고 내용도 정비되어 대대로(大對盧) · 태대형(太大兄) · 대절(大節) · 선인(先人) 등의 관제를 두고 역할을 분담하였다.
백제는 3세기경 고이왕 때부터 관제가 마련되어 6좌평(佐平) 16등급을 두었으며 복제(服制)를 정비하였다. 좌평은 제1관등인 동시에 소관업무를 표시하는 명칭을 붙여 관직을 나타낸 것이다.
6좌평으로는 내신좌평(수상직으로 왕명출납 담당) · 내두좌평(재무담당) · 내법좌평(의례 등 예식담당) · 위사좌평(숙위병 등 親衛 담당) · 조정좌평(형옥 등 사법담당) · 병관좌평(병마 등 국방담당)이 있었다. 또한 관직의 업무나 성격이 불명확한 16등급의 관계를 두었고, 왕실사무와 중앙정부의 사무를 담당한 내외관 22부를 두었다.
신라의 경우 골품제와 이벌찬 등의 17관등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골품에 따라 관등, 승진 및 일상생활의 상한선이 제약되었다.
성골은 부모 양쪽이 정통 왕족인 경우로 왕이 될 수 있으며, 진골은 부모 중 한 쪽만이 왕족인 중앙귀족인데 무열왕 때부터 진골이 왕이 되었다. 6두품은 큰 족장들이 차지하고, 5두품과 4두품은 작은 족장들이 차지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왕권강화를 위한 중앙집권적 행정체제로 정비하여 새로운 중앙관제를 확립하였다. 즉 귀족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화백회의의 의장을 맡았던 수상격의 상대등(上大等)을 무력화시키고, 집사부를 국가 최고의 행정기구로 확립시켜 시중(侍中)으로 하여금 정치 제일선에서 왕을 보좌하게 하고 국사를 총리에게 하였다. 그 밖에 병부 · 조부 · 승부 · 예부 · 창부 · 위화부 · 영객부 · 좌우이방부 · 사정부 · 예작부 등의 관서를 두었다.
집사부의 시중은 1품인 대아찬이나 2품인 이찬으로 임명하였으며, 정원은 1명이었다. 각 부에는 정원 2∼3인의 영(令)을 두어 관장하게 하였다.
특히 17관등보다 상위에 특별관직으로 대각간, 태대각간을 두었으며, 각 부 외에 상역서(賞賜暑) 등의 6서를 두고, 각 부나 각 서에 독립된 대소관서가 있었다. 이러한 관직에 대한 인력충원을 위한 인사행정은 골품제를 기초로 한 벌족 본위의 인재등용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화랑이나 백관의 천거에 의하여 유능한 자를 발탁하는 천거제가 있었으며, 원성왕 4년에는 관리임용을 위한 국가고시제도인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있었다.
독서삼품과는 종래의 벌족 본위의 인재등용을 지양하고 학벌본위 · 시험본위 제도로 바꾸기 위해 설치된 일종의 과거제도이다. 국학생의 등급을 상 · 중 · 하품의 3등급으로 나누어 고시를 치러 인재를 등용하는 일대 혁명적인 조치였지만, 골품제도 등의 사회적 제약 때문에 실패하였다.
고려의 행정조직은 2성 6부제의 중앙과 5도 양계의 지방행정조직으로 구분할 수가 있는데 행정조직의 정비와 동시에 인사행정도 비교적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이 분화되어 문관은 이부에서, 무관은 병부에서, 교육과 과거는 예부에서 담당하였다.
관리는 주로 과거제도에 의하여 임용하였다. 과거제는 광종 9년(958)에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에 의해 처음으로 실시된 인재등용 방식으로 호족세력을 억압하고 관료 · 문치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원래 과거제는 수나라 양제가 진사과를 두어 관리를 등용한 데서 기원한 것으로서, 고려의 과거제는 처음에는 1차시험뿐인 단시(單試)였으나 광종 15년부터 복시가 되었고, 선종 때 3년에 1번씩 시험을 치르는 제도가 정착되었다.
공민왕 18년에는 향시 · 회시 · 전시의 3시제도가 채택되었고 공양왕 2년에 무과제(武科制)가 과거과목으로 제정되어 초기의 문관등용시험인 제술과(製述科:進士科) · 명경과(明經科) 외에 기술관 등용시험인 의(醫) · 복(卜) 등의 과와 명법(明法) · 명산(明算) · 명서(明書) 등의 잡과(雜科)가 증설되어 조선시대 과거제의 전신이 되었다. 특히 불교를 중시하여 광종 때에는 승과가 설치되어 교종과 선종으로 구분하여 실시하였다.
과거의 시험과목은 제술과의 경우 시(詩) · 부(賦) · 송(頌) · 책(策) 등의 문예, 명경과는 경전(經典), 의과는 의학, 복과는 천문 · 지리 · 음양학 등, 승과는 교종과 선종시험이 있었다. 그러나 공양왕 2년에 증설된 무과는 2년 후에 고려가 멸망함으로써 한 번도 실시되지 못하였다.
과거응시자격은 5역(逆) · 5천(賤) · 불충(不忠) · 불효(不孝) · 향(鄕) · 부곡(部曲) · 악공(樂工) · 잡류(雜類)의 자손을 제외한 양민 이상의 신분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제술과와 명경과는 응시자격을 주 · 군 · 현의 부호장 이상의 자손인 양반자제로서 한정하였고, 잡과는 천민을 제외한 일반민 누구에게나 자격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농민의 자제는 과거시험 준비를 위한 시간적 ·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사실상 귀족자제들만이 응시할 수 있었다. 또한 응시연령에 제한을 가하여 공민왕 25년에는 25세 미만자는 응시가 불가능하였으나, 우왕 12년에는 응시연령이 20세로 인하되었다.
과거는 3년에 한 차례씩 치르는 식년시를 원칙으로 하였다. 중앙과 지방에서 제1차 시험을 실시하여 상공(上貢, 개경 합격자) · 향공(鄕貢, 각 주현 합격자) · 빈공(賓貢, 외국인합격자)을 선발하고, 이들 3공 가운데 국자감의 재시를 통과한 합격자에게 최종시험인 감시를 보게 함으로써 최종 과거합격자를 선발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감시합격자를 왕이 시(詩)부(賦) · 논(論)으로 친시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복시(覆試)라고도 한다. 이 복시 합격자에게는 홍패를 주었다. 복시제는 성종 2년부터 부정기적으로 실시되었으나 인종 이후 폐지되었다.
합격자의 정원에는 제한이 없었으나 고려 중엽 이후 33인으로 고정되었으며, 과거급제자에게는 일정한 전지(田地)를 주어 특별한 대우를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문관은 이부(吏部)에서, 무관은 병부(兵部)에서 인사를 관리했다. 관리에 대한 신분관리, 즉 전주(銓注)의 자료로 정안(政案)이 있었는데, 이는 현직 관리나 전직 관리의 성명과 이력, 그리고 근태 · 공과 · 재능 여부 등을 기입한 인사고가표였다.
그러나 최씨의 무신집권이 시작되면서부터 백관의 전주를 최씨 가문의 사설기관인 정방에서 다루기 시작하였다. 이후 고려의 인사행정은 극도로 문란해져 권신(權臣)의 어린아이들이 부당한 방법으로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분홍방(粉紅榜)이라고 혹평받을 정도였다.
조선시대의 통치체제는 국왕의 지위와 권한이 한정된 중앙집권적인 관료지배체제였다. 관직에 오르는 이는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으로 권력, 부, 명예를 부여받는 등 신분 및 그에 따른 특혜가 관직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 인사행정의 기본법으로는 『經國大典』 · 『大典會通』을 들 수 있으며, 관리는 문 · 무 양반으로 크게 나뉘며, 각 반은 다시 중앙직인 경직(京職)과 지방직인 외직(外職)으로 나뉘었다. 모든 관리는 정1품에서 종9품에 이르기까지 18품계중 하나에 속해 있었다.
인사행정의 공정성과 신중성을 기하기 위하여 고시전형기관과 관료의 임면관리 담당기관을 별개로 하였다. 즉 고시전형은 예조에서 주관하였고, 임면 등의 인사행정은 문관은 이조, 무관은 병조에서 주관하게 하였다.
특히 유능한 인재를 특별선발하고 신중성 확보를 기하기 위한 현량과(賢良科) 등의 천거제도와, 임용에 있어 성정주의를 존중하면서 임명권자의 재량을 존중하기 위한 비삼망제(備三望制) 등이 있었다.
관료를 충원하는 제도로는 크게 가문의 혈통을 바탕으로 타천에 의해 등용되는 음서제(蔭敍制)와 개인의 능력을 기준으로 자천에 의하여 등용되는 과거제가 있었다.
엄격한 신분제의 제약에 기반을 둔 조선시대 관료제 사회의 과거 우선주의와 실적주의에도 불구하고 혈통을 기준으로 하는 음서제가 존재하였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음서란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의 공음에 따라 관리를 서용하는 것으로서, 유족들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는 인사제도였다. 3품 이상 관직의 아들 또는 손자에게만 음직이 적용되었으며, 각종 취재시험(取才試驗)과 함께 하급관료를 충원하는 인사행정제도로 시행되었다.
음서에는 종친들의 종친음(宗親蔭), 일반 가문 출신의 문음(門蔭), 그리고 공신자손들의 공음(功蔭) 등이 있었다. 여기에서 종친음은 주로 봉작(封爵)이었고, 문음과 공음은 음자제(蔭子弟) 취재시험을 거쳐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의 관품에 따라 7품 이하의 문무 양반 관직이나 이직(吏職)인 녹사직(錄事職)에 종사할 수 있게 하였으며, 무능력자는 원할 경우 특수군에 입속시켜 체아직(遞兒職)을 받을 수 있었다.
음직은 장자를 원칙으로 하였으나, 유고시 장손이나 차자가 감등수직(減等受職)하게 되어 있었으며, 또 아들과 손자가 없을 때에는 2품 이상관이면 자손(子孫)과 제(弟) · 질(姪) · 서(壻)까지를 포함시켜 그 중의 한 사람이 음직을 받게 되어 있었다.
3품관은 실직(實職)을 지낸 자의 자(子)와 손(孫)에 한하였으며, 그 밖에 주요 청요직(淸要職) 관료의 자까지 포함시켰기 때문에 신분에 따른 관리등용의 기회를 확대했을 뿐만 아니라 정권의 안정까지 도모하는 효과가 있었다.
과거제는 고려 광종 9년(958) 쌍기(雙冀)의 건의로 당(唐)으로부터 우리 나라에 도입된 것으로, 조선시대 법제의 근간인 『경국대전』에 의하면 문과 · 무과 · 잡과의 3개로 분류되는 실적주의에 근거한 관리충원제도였다.
문과에는 대과와 소과(生進科 또는 司馬試)가 있었으며 조선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관자격시험이었다. 무과는 무관자격시험으로서 대과 · 소과의 구별이 없는 단일제도였다. 잡과는 기술관자격시험이었다.
3과는 모두 3년마다 한 번씩 실시하는 정기적인 식년시(式年試)를 원칙으로 하였다. 문과고시의 경우, 소과의 초시 · 복시(覆試) 2단계, 대과의 초시 · 복시 · 전시(殿試) 3단계, 도합 5단계를 통과해야만 급제되었다.
제1단계인 소과초시에는 진사과와 생원과 2종이 있었으며 각 도의 정수에 따라 각각 700인(뒤에는 540인)을 선발하였다. 선발과목은, 진사과는 부(賦) 1편과 고시(古詩) · 명(銘) · 잠(箴) 중에 1편(篇)을, 생원과는 오경(五經)의 의(義) 1편과 사서(四書)의 의(疑) 1편을 짓게 하였다.
제2단계인 소과복시(일명 會試)는 초시합격자를 중앙에 모아 성균관에서 예조(禮曹)의 주재하에 초시와 동일한 과목을 과하여 생원 · 진사 각 과에서 각 100인을 선발하였다.
제3단계인 대과초시(일명 東堂初試)는 회시에 합격한 생원 · 진사를 모아 식년 · 전년 가을에 한성부와 8도에서 지역별로 관찰사 주재하에 이른바 3장(場)에서 고시하였다.
고시과목은 『경국대전』 내지 『대전회통』에 보면 진사과 제술시(製述試)의 경우 초장(初場)에서 오경 · 사서 · 의의론(疑義論) 삼자 중의 2편, 중장(中場)에서 부(賦) · 송(頌) · 명(銘) · 잠(箴) · 기(記) 5자 중의 1편과 표(表) · 전(箋) 중의 1편, 종장(終場)에서 대책(對策) 1편을 보았다.
생원과는 경(經) 외에 자사(子史)도 넣음으로써 강서(講書) 또는 강경과(講經科)라고도 하였으며, 초시 · 복시를 통하여 단장(單場)으로 사서오경을 시험하여 등용하였다.
제4단계는 대과복시로서 대과초시 합격자를 식년 봄에 한성에 모아 예조의 주재하에 시행하였다. 제술과는 초장 없이 중장과 종장에서 초시의 것을 한번 더 보며, 명경과(明經科)는 단장이며 사서삼경으로 강서하여 양과를 합해 33인을 선발하였다.
끝으로 제5단계는 대과전시로서 국왕이 친히 임한 가운데 복시합격자 33인에 대하여 갑과(甲科) 3인, 을과(乙科) 7인, 병과(丙科) 23인으로 등급을 판정하였다. 시험과목은 대책(對策) · 표 · 전(篆) · 잠 · 송(頌) · 제(制) · 고(誥) 중의 한편의 제술(製述)이 과해지며 단장이다. 대과급제자에게는 국왕의 어사화(御賜花)가 하사되었고, 창방(唱榜) · 유가(遊街)의 축하행사가 행하여졌다.
정규적인 식년시 이외에도 부정기적인 과거시험으로는 국가경사에 수시로 시행된 경과(慶科), 즉 증광시(增廣試) · 별시(別試) · 정시(庭試) 및 춘당대시(春塘臺試) 등이 있었다. 특히 성균관 및 4학(四學)의 유생을 위하여 특지(特旨)로서 시행하는 반제(泮製), 즉 알성과(謁聖科) · 응제(應製) · 절일제(節日製) · 황감제(黃柑製) 및 도기과(到記科) 등이 있었다.
그리고 경서강독의 권장을 목적으로 시행된 유생전강(儒生殿講), 먼 지방의 유생을 위하거나 지방민심의 수렴을 위한 과시로서 도과(道科) 또는 외방별과(外方別科) 등이 있었다.
아울러 양반의 만류나 경아전(京衙前) 등 일정한 신분을 가진 자 중에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한 시험으로 취재(取才)가 있었다. 이상 부정기 특별 과시는 실로 그 종류가 많았으며 과시의 내용과 절차는 대체로 식년시와 같았다.
한편 현직관료의 승진에도 성적주의가 적용되었는데 현직관료로 하여금 응시하게 한 승진시험으로서는 중시(重試)가 있었다. 이는 비급문신(卑級文臣)의 실력배양과 인재등용 그리고 재상 및 종친 등의 계속 정진을 격려할 목적으로 설치된 것으로 발영시(拔英試) · 등준시(登俊試) 및 진현시(進賢試) 등이 그것이다.
특수계층에 대한 제한특과로서 종친과(宗親科) · 충량과(忠良科) · 경잠과(耕蠶科) · 기로과(耆老科) 등이 있었으며, 인재의 배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초계문신친시(抄啓文臣親試)가 있어 여기에 급제한 자는 특별승진 또는 특별 보직의 혜택이 주어졌다.
이상의 정기적 · 부정기적 과시와 각종의 특별과시들은 조선시대 지배엘리트인 양반관료를 정치적으로 임용하는 시험으로서, 전통적으로 관리충원의 지배적인 형태였다. 특히 상문주의(尙文主義)에 의해 중시된 문과의 응시에는 엄격한 자격제한 조건과 신분상의 제한이 동시에 가해졌다.
그 밖에 조선시대의 관리등용을 위한 특별시험으로는 양반의 말류인 음자제(蔭子弟)와 경아전(京衙前)인 녹사(錄事) · 서리(書吏) 등 일정한 신분을 가진 자를 위하여 제한된 관원에 등용 또는 채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무관(武官)의 인력충원방법으로 문과와 마찬가지로 과거제도가 시행되었다. 다만 무과는 대과 · 소과의 구별이 없는 단일제였으며, 초시 · 복시 · 전시 3단계의 식년시와 임시과시 · 특별과시가 있었다.
초시의 경우 식년과 전년의 가을에 중앙은 훈련원(訓鍊院)에서 70명의 원시(院試)를, 지방은 각도 병사 주재하에 전국에서 120명의 향시(鄕試)를 뽑았다. 시험과목은 각종 실기에다 약간의 강서(講書)를 과하고 시관은 문관 1인과 무관 2인의 3인으로 하였다.
복시는 식년 봄에 초시합격자를 대상으로 하여 병조와 훈련원 주재하에 회시하여 28인을 선발하는데 시험과목을 보면 초시에서와 동일한 무예와 강서로서, 병정(兵政) · 진법(陳法) · 병장설(兵將說) 중의 하나, 무경(武經) 7서 중의 하나 또는 기타의 병요(兵要) 등 6서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하여 시험하였다.
마지막 전시는 복시합격자 28인을 모아 기격구(騎擊毬) · 보격구로써 갑 · 을 · 병과에 각각 3 · 5 · 20인으로 석차를 정하는 것이었으며, 그 합격자를 무과출신이라 하였다. 이외에도 증광(增廣) · 별시(別試) · 정시(庭試) · 외방별과(外方別科) 등의 임시과시와 각종 취재 등의 특별과시가 있었다.
끝으로 잡과로는 역과 · 의과 · 음양과 · 율과가 있었다. 대 · 소과의 구별이 없는 제1과로서, 초시 · 복시의 2단계로 시행하는 식년시와 이외에 증광시와 결원의 보충과 승진을 위한 취재제(取才制)가 있었다.
초시는 식년과 전년 가을에 한성에서 관계 · 각사 주재하에 치러졌고, 복시는 관계 · 각사와 예조가 합동으로 담당하였다. 시험과목은 전문분야별로 다양하였으며 채용인원과 주관 관아도 중앙[표 1]에서와 같이 다양하였다.
이상의 조선시대 인사행정제도인 과거제를 통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하에서의 국왕은 그 자신의 보조자로서 충성되고 유능한 인재를 선발할 필요가 있었으며, 아울러 시험과목을 유교경전으로 설정함으로써 유교의 세뇌작용을 통하여 국민사상과 정치문화의 통일을 기하였다.
또한 관료의 사회적 지위의 세습화를 방지 혹은 통제하여 사회인심의 쇄신을 꾀하는 동시에 중앙집권화를 통한 왕권의 강화를 촉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유교관료제의 역기능으로는 사장편중(詞章偏重)의 성리학이 주요 내용이 되어 있었기에 관료에 임용되더라도 국가 경론이나 실무에는 생소하거나 무관심하게 되는 경향이 많았으며, 단지 개인이나 가문의 영달에만 집착하여 특권적 행세를 자행하거나 사리사욕 · 가렴주구를 일삼은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신분적 제약으로 인하여 인재의 개방적 등용이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았다.
관료의 인사관행과 품계에 관하여 살펴보면, 조선시대 관료의 충원으로 과거를 통하지 않고 입사(入仕)하는 제도로 음직 또는 남행(南行)이 있었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러나 조선시대 초기 인사행정으로 보거(保擧) · 거관(去官) · 포폄(褒貶) 등의 인사 관행이 있었다.
보거는 주로 현임 참상(參上) 이상의 관원이 관직에 임용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을 공개적으로 천거하도록 하여 인사의 공정성을 보장하도록 운영된 관례로서, 태종 5년 관제개혁으로 문반 · 무반의 인사를 이조 · 병조가 맡게 된 뒤부터 이러한 보거규정(保擧規定)이 본격적으로 정비되어 인사의 공정을 기하는 데 기여하였다.
거관은 한 관직에서 임기를 채운 관리가 그 관직을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데 특히 관직의 상한(上限)으로 인해 다른 관서로 떠나는 것만을 거관 또는 도목거관(都目去官)이라 하였다.
포폄은 세종대에 정비된 인사고과제도로서, 경관(京官) · 외관(外官)의 근무기관과 성적을 합쳐 가산함으로써 경관과 외관의 차별이 해소되고 인사관리가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고 포폄을 근거로 근무일수에 따라 관품을 승급시키는 순자법(循資法)의 단계적 확대적용으로 인해 관리의 품계가 더욱 중요시되고 관리통제도 강화되었다.
특히 정3품 상계(上階, 通政大夫 · 折衝將軍)에 대한 인사관리가 강화되어 반드시 국왕의 윤허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제도를 근거로 관료가 될 적격자를 선발 · 임용하고 재직관료의 성격에 따라 승임 · 전임을 결정하는 인사행정을 도목정사(都目政事)라고 하였다.
관리의 인사는 관료의 재직연수와 근무평정에 따라 매년 6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문관은 이조에서, 무관은 병조에서 각기 판서(判書) 이하의 책임자들이 회동 심의한 결과를 왕지를 물어 승임 · 전임 등의 인사조치를 정기적으로 행하였으며, 부정기적으로 긴요한 보임을 행하는 산정(散政)이 있었다.
관리의 임용절차를 보면, 문무관의 인사를 담당하는 전조(銓曹)라고 불리는 이조 · 병조에 각 판서 이하의 책임자들이 모여서 근무평가서인 도역장(都歷狀)에 의하여 심의한 뒤 적격자 3인씩을 후보자로 선발하여 그 성명을 일일이 기록하여 왕에게 주문(奏聞)하도록 하는 비삼망제도(備三望制度:한 사람의 벼슬아치를 뽑을 때에 세 사람의 후보자의 이름을 갖추어 천거하던 일)가 있었다.
이어서 국왕이 세 명의 후보자 중의 1인에게 점을 찍어 최종 결정을 내리는 낙점(落點) 또는 비하(批下:전조에서 올린 세 사람 중에 국왕이 한 사람에게 점을 찍어 결재를 내림)를 거쳐 조보(朝報)에 공표함으로써 인사조치가 행해진다.
그러나 서경(署經) 절차가 있어 관리로 임용된 자도 신분상의 적격여부를 심사받아야 하였다. 즉 당하관이 임명되면 전조는 당사자의 내(內) · 외(外) · 처(妻) 삼족의 4조(祖)를 열기하여 사헌부와 사관원에 보내며, 이에 양사는 적격여부를 판정한 뒤 인준함으로써 임관이 확정되고, 마지막으로 이조 · 병조에서 직첩(職牒) 또는 고신(告身)이 발급됨으로써 임용절차가 모두 종결된다.
조선시대 관계(官階)는 관료의 등급을 품(品) 또는 유품(流品)이라 하여 정(正) · 종(從) 각 9품으로 나누고 이 안에 드는 관료를 유내(流內), 그 밖의 비잡제직(卑雜諸職)으로서 실직 아닌 산직(散職) · 영직(影職) 및 잡직 등을 유외(流外)라 하였다.
이 18품 중에 문관 4품 이상을 대부(大夫), 5품 이하를 낭(郞), 그리고 무관 2품 이상을 대부, 3 · 4품을 장군(將軍), 5 · 6품을 교위(校尉), 7품 이하를 부위(副尉)라고 하였다.
관품은 정 · 종 각 9품, 합쳐 18품을 준칙으로 하고, 종6품 이상에는 각 품에다 상 · 하계를 두고 정1품에는 특히 3계를 두었다. 또 전계열 중에 몇 개의 층계가 있어 관위의 존비를 표시하였다. 당상 · 당하 · 참상 · 참하가 그것이다. 당상관은 정3품 상계 이상을, 당하관은 정3품 하계 이하를, 그리고 참상관은 종6품 이상을, 참하관은 정7품 이하로 구분, 예우하였다.
당상관과 당하관의 구조와 기능을 보면 당상관 내에서는 관계의 고하에 따라 석차를 정하였고(座目이라고 함), 각 품안에서는 정 · 종으로 구분하였다. 1품은 국정 전반에 걸쳐 책임을 공유하였고, 2품은 국정의 특정 부분에 책임을 공유하였으며, 3품 당상은 보조업무 또는 특수업무를 담당하였다.
왕의 정책관료인 당상관 인사는 왕의 교지로 내리는 관교(官敎)와 왕의 낙점을 받는 수점(受點)을 거치게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당상관 인사를 왕이 특별히 주관한 것은 가산관료제적(家産官僚制的)인 관례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왕위를 비롯한 모든 관직은 공기(公器)라는 인식이 조선시대 관료 문화에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당상관의 특전으로는 그 가문에게 관직진출자격을 주는 대가제(代加制)가 적용되었다. 이 제도는 조선시대 지배층의 결속과 신분적 보수화를 강화하는 기능을 하였다.
당하관은 6품 이상의 참상(參上)과 7품 이하의 참외(參外)로 구분되고, 참상에는 다시 4품 이상의 대부(大夫)와 5품 이하의 사(士)를 구분하는 계선이 있어 당하관은 3∼4품, 5∼6품, 7품 이하로 구분되기도 하였다.
3품은 중앙의 3품 당하아문의 장관 등을, 4품은 4품 아문의 장관이나 1품 아문의 낭관(郎官) 등을, 5∼6품은 5∼6품 아문의 장관이나 2품 아문의 낭관 등을 담당하였으며, 7품 이하는 각사에서 3품 이하 6품 이상 관을 보조하는 기능을 수행하거나 사족에 비하여 차별대우를 받는 하위계층이 맡는 역(役)의 성격의 일을 담당하였다.
참상관은 왕정에 참여하는 계층이며, 참외관은 조참(朝參)하지 못하는 7품 이하로써 참상 이상으로 올라가는 전초단계로서 의미가 크다.
참상관에는 문반 · 무반 · 종친 · 부마 외에도 기술직이 있었고 체아직(遞兒職)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 구성이 다양하고 복잡하였다.
그리고 최상위직인 당상관의 폭주를 막기 위하여 관계 · 관직 체계관리를 통하여 참상관이 당상관으로 올라가는 것을 구조적으로 차단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참상관 안에서 3품과 4품 사이에 구별을 두어 4품에서 수령을 지내지 않은 경우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 하계)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인사고과(세종 5년 6월 甲寅)를 통하여 참상에서 당상으로 순조롭게 올라가는 데 약 40년이 걸리도록 되어 있었으나(참상의 관계인 6∼3품은 각기 正從雙階로 도합 16階였고, 1계 승급에 30개월이 소요됨), 예외적인 인사관례로서 청요직(淸要職)인 의정부의 사인(舍人) · 검상(檢詳), 육조의 정랑(正郞) · 좌랑(佐郞) · 대간(臺諫) 등을 거치지 않으면 사실상 당상관에 오르지 못하게 하여 참상관으로 그칠 수밖에 없게 하는 인사정책을 쓴 것이다.
관직규모로 보면 참외관이 가장 많았으며 대부분이 체아직을 중심으로 운영됨으로써 다양한 신분계층의 관직진출 욕구를 흡수 · 포습하는 기능을 하였다. 조선시대 관직은 초기에는 계(階) · 사(司) · 직(職)이라는 순서로 되어 관계와 결합하여 신분과 직역의 지표로 삼아 왔다.
관계와 관직의 미분리를 전제로 한 순자법(循資法)의 엄격한 적용은 관직의 관계와 관원의 관계 사이에 괴리를 일으켜 참상관의 인사에 불편을 초래하였다.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행수법(行守法)을 시행하였으며, 그 결과 관계와 관직은 분리되기에 이르렀다(세종 26년, 1444). 행수법에서는 관계가 높고 관직이 낮으면 행(行)이라 하고, 반대로 관계가 낮고 관직이 높으면 수(守)라 하되, 관계를 뛰어 넘을 때에는 일정한 한계를 정하였던 것이다(7품 이하는 2階를 넘지 못하고, 6품 이상은 3階를 넘어 守를 하지 못함 『經國大典』 吏典京官職條).
관계는 행정관서와 관직 및 관원을 조직하는 기준으로서 신분과 직종에 따라 분화시키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관계체계를 집약한 ≪경국대전≫에 의하면 다음 [표 2]에서와 같이 예우직인 종친 · 의빈(儀賓)을 제외하면 동반직(東班職)은 정1품에서 종9품에, 서반직(西班職)은 정3품에서 종9품에, 사관직(士官職)은 정5품에서 종9품에, 잡직은 정6품∼종9품에 각각 설치되었다.
관직체계와 관계의 차대(差待)에 관하여 살펴보면, 관계를 매개로 한 관직에 따른 차대는 신분계층에 따라 나타나고, 신분계층에 대한 차대가 관계의 차등으로 구조화됨으로써 차대가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관직은 문반과 무반, 조관(朝官)과 사관(士官), 유품직(流品職)과 유외잡직(流外雜職) 등으로 구분되고, 또 인사관리상으로는 정직(正職)과 체아직, 녹관(祿官)과 무녹관(無祿官)으로 구분되었다. 또한 서반직인 체아직 · 영직 · 잡직 · 사관 · 이전(吏典) 등은 여러 신분계층을 포섭, 편제하는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무반에 속하는 관계로서 차대를 받았다.
지배층의 규모확대는 관직경쟁을 치열하게 하였으며 관직체계는 더욱 분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485년(성종 16)에 『경국대전』의 반포로 제도화되었다.
조선시대 관료의 총원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으나, 초기에는 문관 수가 정1품에서 종9품까지 520여 명이고, 무관 수는 상장군에서 대장 · 부대(副隊)에 이르기까지 4,170여 명이었으며 계속 증원되었다.
세종 때에는 참찬인 황희(黃喜)가 “개국의 초창기에는 일이 많았으나 재추(宰樞)의 수가 40 미만이었던 것이 그 뒤에(筆者註, 약 30년간) 증원되어 70명에 이르렀습니다……. 과도한 녹봉을 쓰게 되어 그 폐단이 적지 아니합니다…….”고 하여 중요하지 않은 관직의 감축을 진언한 바 있다. 한때 문반의 내외직이 각각 400명에 달하고 무반은 5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하며, 500여 관직에 대하여 2,330명의 임용후보자가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관직에는 또한 사만(仕滿) 또는 개만(個滿)이라는 임기제를 적용하여 오랜 재임에 따른 폐해방지와 업무숙지를 보장하였다.
예컨대 6품 이상은 출근일이 900일(30朔), 7품 이하는 450일(15朔), 그리고 명예직인 무녹관(無祿官)은 360일(12개월)로 원칙을 정하여 정근한 것이다. 특히 지방관의 임기는 비교적 엄격하게 지켜졌다.
이를 과만(瓜滿) · 과기(瓜期) 또는 과한(瓜限)이라 하여 관찰사는 2년, 도사는 1년, 수령은 5년, 당상관과 가족을 동반하지 않은 수령 및 훈도(訓導) 등은 2년 반으로 규정되었으나, 뒤에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한편 업무의 전문성과 능률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전문인력, 예컨대 서무 · 회계급 직위에 대해서는 임기에 구애받지 않고 오랫동안 재임하게 하는 구임제도(久任制度)를 두어 관리하였다.
관직의 임기만료 때에 해유(解由:관아의 물품을 맡아 관리하던 벼슬아치가 후임자에게 사무를 인계하고 호조에 보고하여 책임을 면하는 일)라는 관례가 있어서 재직중의 회계 · 재정 또는 현물에 대한 심계를 받아 책임을 묻는 감사제도가 있었다.
중앙의 전곡아문관리(錢穀衙門官吏)의 해유와 특히 지방관의 해유는 언제나 엄밀히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 사무는 호조(戶曹)의 산학청에서 관장하였다.
인사임용에 있어서 어떤 관직은 그 직책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이력의 유무를 가려 임용하는 동반의 사송이력(詞訟履歷), 서반의 변지이력(邊地履歷) 등의 인사 전형상의 내규가 있었다.
예컨대 음관(蔭官)이 지방관에 임명될 때는 호조 · 형조 · 한성부 · 사헌부 등에서의 소송판결의 경험이 요구되었고, 방어사(防禦使) · 병(兵) · 수사(水使)의 요직에 오르려면 국경수비의 경험이 요구되었다.
경관직이나 특히 지방관직에서, 재직관원과 일정한 친척관계가 있거나 직무수행상 분리시킬 필요가 있는 관계에 있는 경우에는 함께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한 상피제(相避制)가 있었다.
이 제도는 외관이 임지에서 친척관계와 동향출신관계 등의 결합으로 인하여 지방호족세력을 형성하여 반란을 야기하거나 또는 정실에 빠져 여러 가지 폐해를 가져올 위험을 피하고자 한 것이다.
특히 인사행정에서 관리임용을 위한 전형절차가 신중하였으며, 이를 위해 관료의 신분대장인 정안(政案)과 관리의 고과, 표폄 및 성적 우열의 판정표인 전최(殿最) 등이 준행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특히 근무성적을 평정하는 고과를 위해 고공법(考功法) · 고적출첩법(考績黜陟法) · 고과전서법(考課銓叙法) 등이 실시되었다.
관리의 근무시간은 묘시(卯時, 오전 6시)에 출근하여 유시(酉時, 오후 6∼7시)에 퇴근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고위 공직에 봉사한 뒤 사후에 보훈하여 품계와 관직명을 추증하는 증직제(贈職制)와 생전의 행적에 따라 이름을 대신하여 시호(諡號)를 주는 증시제(贈諡制)가 있었다.
조선시대 관리의 보수제도인 녹봉제에 관하여 살펴보면, 개국 초 이성계(李成桂)는 정권을 장악한 뒤 절박한 군량과 국용(國用) 및 관료들에게 지급할 녹봉을 해결하기 위하여 전제개혁으로 과전법(科田法)을 제정 · 선포하였다. 이로써 전국의 토지를 공전(公田)으로 편입시켜 신진관료들에게 과전(科田)의 녹봉을 지급받게 하였다.
이 때의 녹봉제(祿俸制)는 대체로 고려시대의 녹봉제를 계승하여 녹과(祿科)와 월봉(月俸)을 구별하였다. 녹은 사맹삭(四孟朔), 즉 3개월(정월, 4월, 7월, 10월)마다 분급되는 경우와 이에 준하는 경우이며, 봉(俸) 또는 과(科)는 그 밖에 월별 이하로 급여를 지급하는 경우로 생각된다.
관리의 보수제도는 토지와 현물의 두 가지 형태였다. 과전 또는 직전을 분급받는 동시에 양곡이나 면포 등의 현물로 받는 녹과가 있어서, 관계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받았다.
녹봉제는 경관록(京官祿) 위주로 실시되었으며 외관에게는 녹봉의 정액이 없었다. 다만 경관으로 겸차된 관찰사 · 절도사 · 도사(都事)와 양계(兩界)의 우후(虞候) · 평사(評事)만이 녹을 받았고, 각 주와 현에는 아록전(衙祿田)이 없는 외관이 많았다. 이와 같이 녹봉제가 경관록 위주로 운영된 것은 조선시대 관료제의 중앙집권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초의 녹봉제는 세종 때부터 실적주의 원칙으로 녹제가 운영됨으로써 산직(散職) · 산관(散官)에 대해서는 녹봉이 지급되지 않았다. 1439년(세종 21) 정월부터 새로 춘하추동 사맹삭반록(四孟朔頒祿)을 시행하게 되었는데, 이는 ≪경국대전≫에도 거의 그대로 반영되어 조선 녹봉제가 일단 완비되게 된 것이다.
1467년( 세조 12)에는 과전법(科田法)이 직전법(職田法)으로 개정되었다. 이는 현직관료들에게만 토지를 지급하고 사전(私田)의 확대를 막기 위한 개혁으로 단행된 것이나, 이 개혁도 토지의 사유화를 막지는 못하였다.
또한 과전의 부족, 직전법의 폐해 등으로 1470년(성종 원년)에는 직전세(職田稅)의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로 개정하여 관에서 직전세를 징수하여 일정액을 지급하는 녹봉제를 채택한 바 있으나, 이것도 1556년(명종 11)에 폐지되었다. 그 뒤 임진왜란 이후에는 현물지급의 녹과만 지급되는 등 빈번한 변경이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통치체제가 이완, 변질되었고 행정의 유폐가 기승한 데다가 당쟁이 더욱 격심해져 지도층의 내부분열이 생기고 관기가 해이해지면서 각종의 행정상의 폐해와 특히 인사행정의 문란이 증대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임란 이후 과거제의 난맥상과 매관매직 폐해의 보편화, 그리고 필요 없는 관직의 증설을 들 수 있다.
과거시험에는 본래 그 응시자격을 신분상으로 엄격히 제한하였으나 임란 후에는 호적이 불비하여 신분제도의 혼잡이 극심하였기 때문에 신분상의 응시자격제한이 거의 무시되었다.
따라서 신분의 사칭이나 대리응시하는 사기행위가 많았으며, 또한 응시자의 연고자가 시험관이 되어 부정행위를 자행하거나 여러 가지 과장행사(科場行私)의 폐단이 성행하였다.
이 밖에 공명첩(空名帖)을 발매하여 관기의 문란을 조장하거나 공정해야 할 인재추천이 당파관계, 뇌물수수, 사원관계 등에 의해 좌우되었으며, 특히 매관제도의 폐해가 일반화되어 감사, 수령 등 공직이 다른 재화와 같이 정기적 가격에 의하여 매매되었다.
후기의 이와 같은 인사행정의 폐해의 원인으로는 관직의 정원이 무시되고 쓸데없는 인원이 많았으며, 특히 중앙집권체제하에서 지방행정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아 상하의 관원이 행정상 무책임해졌고, 대체로 수령의 임기가 짧았던 점 등을 들 수 있다.
한말 개화기에 들어서면서 인사행정의 근대화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1885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혁신정부가 표방한 정강에서는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人民平等)의 권리를 세워 인재를 등용할 것(以人擇官, 勿以官擇人事)”이라는 원칙을 표방하여 근대적 인사행정의 원리로서 인권평등에 준거한 개인의 능력 본위의 실적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물론 이 시기의 근대화 개혁은 유산(流産)되고 실시되지는 못하였으나, 그 10년 뒤인 1894년 12월에 고종(高宗)이 선포한 「홍범(洪範) 14조」에서 근대적 인사제도의 개혁이 정식으로 선포되고, 뒤이어 갑신개혁을 통하여 행정의 중립화와 자격임용제 및 관기확립 등 인사제도의 근대적 개혁이 광범하게 시도된 바 있었다.
갑오개혁은 우리 겨레의 자주적인 근대화 개혁이라기 보다는 일본의 침략적 야욕이 내포된 내정간섭으로 강요된 것이기는 하나, 한편 동학혁명운동에서 제기된 개혁강목이나 또는 한말의 후기 개화운동의 일환으로서 그 동안 내재적으로 성장된 근대화의 개혁이념을 구현한 자주적인 면도 간과할 수 없다.
즉, 「홍범 14조」에서 “용인(用人)에는 문지를 불고하고 구사(求士)에는 조야에 편급하여 인재의 등용을 널리한다.”고 규정하여 인재등용에는 출신문벌이나 조야를 가리지 않고 널리 유능한 자격자를 채용할 것을 표방하였다.
이에 준거하여 갑오개혁에서 이루어진 인사제도 개혁의 주요한 내용들은 비록 그대로 실현되지는 못하였으나 조선왕조 500년 전통의 관료제도의 면모를 일신하는 것이었다.
즉 공직의 분류, 품계, 신분, 봉록, 임용의 제반 법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또 관리복무규율, 관리징계령도 새로이 제도화한 것이다. 갑오년의 제1차 개혁에서는 문관품계 및 육군장교, 그리고 하사관의 계급품계를 [표 3]에서와 같이 개정하였다.
즉, 제1차 개혁에서 문관의 품계가 종전에 1품에서 9품까지 정 · 종을 합하여 모두 18품계였던 것을 3품 이하 9품까지의 정 · 종을 폐하여 정 · 종은 1품과 2품에 한하게 하여 도합 11품계로 축소하였다.
직계도 1품에서 9품까지를 칙임 · 주임 · 판임의 셋으로 구분하되 칙임관은 정 · 종 각 1, 2품, 주임관은 3품에서 6품까지, 판임관은 7품에서 9품까지로 개정하였다.
그리고 육군장교와 하사관의 계급품계 개정은 [표 4]와 같다.
육군계급은 당시 일본의 육군계급제를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간부(幹部)의 계급은 장성급, 영관급 및 위관급으로 분류되어 있고, 그 밑에 하사관(下士官)인 교관급(校官級)과 일반병계급(一般兵階級)이 있었다.
1885년의 제2차 개혁에서는 관등봉급령(官等俸給令)에 의하여 일반 관리의 관등을 규정하였으며, 아울러 무관 및 상당관(相當官) 등 봉급령이 공포되었다.
제1차 개혁의 결과 과록제를 폐지하고 개정된 품계에 따라 품봉을 제정하여, 관리의 보수는 [표 5]와 같이 품계에 따라 월급을 화폐로 지급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윗사람에게는 후하고 아랫사람에게는 박함이 매우 심하여 무계(無階, 대군 · 왕손 등 왕족)가 350원(元)인 데 비하여 말단관리인 9품(각 부아의 主事)이 15원으로 그 격차가 23배 이상이 되며, 대신급(大臣級)인 종1품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 비율은 13배 이상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은 제2차개혁을 통하여 [표 6]과 같이 보수면에서 계급제도를 지향하면서 상당히 조정되었다.
[표6]에서와 같이 문무관과 궁내부관의 봉급은 종전보다 많이 인상되고, 문관은 무관보다, 그리고 일반관리가 궁내부관리보다 많은 액수를 받았다. 또한 같은 등급도 직종에 따라 액수에 차이가 있는 것도 그 직위나 직무의 정치적 비중이 감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정부관리의 보급률이 윗사람에 후하고 아랫사람에게 박함이 극심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주목되는데, 예컨대 최고의 칙임관 1등과 최저의 판임관 8등의 비율은 42배나 되는 격차가 있었다.
또한 중앙정부의 관리임용에서 고려시대 이래 실시되어 온 과거제를 철폐하고 능력본위 자격임용제를 채택한 것은 인사제도상의 중요한 개혁이었다.
즉 1894년 7월에 새로이 선거조례와 전고국조례(銓考局條例), 그리고 문관서임식(文官敍任式)을 각기 제정하여 새로운 근대적인 관리임용제를 확립하였다.
공직을 보다 합리적으로 분류하여 계급제 관료체계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새로운 품계에 따라 화폐현은(貨幣現銀)으로 지급하는 월급보수제(月給報酬制)도 시도해 보았으며, 성적주의원칙(成績級主義原則)에 의거한 공개채용시험(公開採用試驗)과 승진전형제가 실시되기도 하였다.
관리의 임면권은 경외직을 막론하고, 의정부 특히 실권을 쥐고 있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 귀속되었다. 또한, 1894년 7월 22일에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는 지방문무관의 전형을 내무대신(內務大臣)과 협판(協辦)에 일임하지 않고 의정부회의에서 직접 결정하여 국왕의 재가를 얻도록 결정하였다.
예컨대 관찰사, 각도 유수, 병마절도사 이하 수령 등의 인사고과는 총리대신 · 각부대신 · 도헌(都憲) 등이 합동협의하여 천거하고, 2품 이상은 배수 추천으로 상신하여 왕지(王旨)에 따라 결정하였으며, 3품 이하는 단일 후보를 상신하여 재가임용하였다. 이 밖에 관규를 숙정하고 위반자를 징계처분하기 위하여 새로이 관리복무 규정과 관리징계령을 제정, 시행하였다.
이와 같이 갑오개혁을 통해 시도된 일련의 인사제도의 개혁은 공전(空前)의 근대화개혁이었으나, 당시 약체정권(弱體政權)이 외국대표자의 강제에 의하여 법령으로 발표하고 그 일부가 실시되었을 뿐 대체로 지상(紙上)의 공문계획(空文計劃)으로 그치고 말았다.
즉 소수개화파 엘리트들에 의한 위로부터의 근대화개혁은 국민적 합의를 획득하지 못한 채 일단 좌절되었으며, 그 이후의 개혁운동은 국권이 박탈된 일제식민통치하에서 왜곡된 형태로 계속되게 되었다.
일제식민통치시대 조선총독부의 인사제도는 일본에 의하여 한국식민지화의 준비단계로서 강요된 한말 갑오개혁에서 법령으로 발표된 인사제도의 제반 개혁을 대부분 계승하고 있었다.
일본이 한국의 관료인사권을 빼앗아 간 것은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하게한 때부터 본격화되었으며, 친일적인 한국관료의 형성은 이미 한일합병 이전부터 치밀한 계획하에 이루어졌다.
조선총독부의 관료제 계급은 친임관 · 칙임관 · 주임관 · 판임관 · 촉탁고원(囑託雇員) 등으로 구성되었고, 관료임용시험으로는 공개시험과 전형시험이 있었다.
칙임관 · 기술관 · 공용원에게는 전형시험이 적용되었고, 공개시험에는 고등시험령에 의한 고등문관시험과 보통시험령에 의한 보통문관시험, 그리고 조선총독부 「판임문관임용자격시험규칙」에 의하여 조선인에게 적용되는 판임문관시험 등 세 가지가 있었다.
일본은 한민족에 대한 직접 통치방침을 세워 한국인의 정치참여의 길을 봉쇄하였기 때문에 한국인이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영역은 극히 제한되었다.
1910년의 총독부 중앙기관의 관료 총수는 538명이었는데 그 중 조선인 관료는 불과 38명, 즉 전체의 7%에 불과하였다. 이 38명 중 주임관은 학무국의 기사(技師) 2명, 탁지부의 사무관 1명 등 불과 3명이었고, 나머지 38명은 속(屬, 10명), 기수(技手, 23명), 통역생(2명) 등 그 모두가 판임관인 말단관료들이었다.
이와 같이 중앙행정기관은 모두 일본인 관료들이 장악한 반면, 지방행정기관에는 친일적인 조선인 관료를 많이 등용하였다. 각 도의 참여관(參與官, 1명)과 참사(參事, 3명)를 친일 조선인 유지로 충원하였으며, 부에는 자문기관으로써 각 부 2명씩 모두 24명의 조선인 참사가 배치되었다.
또한 군수 317명이 모두 조선인이었고 각 군에는 2명의 조선인 참사와 4명 내지 5명의 한국인 및 일본인 서기(書記)가 배치되었다.
조선인 관료의 계급별 구성비를 보면 1942년도에 칙임관 22.8%, 주임관 17.7%, 판임관 32.2%, 촉탁 47.7%, 고원(雇員) 57.3%, 회계 44.5%를 차지하였다.
이들 조선인 총독부 관료는 친일관료로서 주로 민중과 직접 접촉하는 부서에 임용되었다. 그 이유는 이들의 급료가 낮은 반면, 민정에 정통해서 능률적일 뿐 아니라 한민족을 회유하고 내부의 대립과 분열을 부채질하여 식민통치하는 일본의 이른바 분할통치정책에 기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5년 광복 후 약 3년간의 미군정기(美軍政期)를 거치는 동안 일제하에서 시행되던 총독행정체제의 기본골격이 대체로 답습 · 사용되었으나, 어떤 분야에서는 매우 이질적인 미국식 제도의 도입 내지 접목시도가 있었다.
그러한 시도 가운데 하나가 미국식 인사행정의 도입이었다. 물론 그 제도가 미처 뿌리를 내리기 전에 미군정이 종식되었지만, 당시 도입되었던 공식적 제도의 개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군정 초에는 조선총독부의 관방인사과(官房人事課)를 중앙인사행정기구로 전용하였으나 뒤에 인사행정처(人事行政處)를 설치하였다.
인사행정처는 미군정청의 중앙행정기관인 처(處) 가운데 하나였으며 단독제인 처장이 이 기구를 관장하였다. 공무원의 임용에 관하여는 실적주의의 원칙을 선언하였다.
즉, 정부에 채용될 자는 성실성과 적성을 확인하기 위한 문관시험(文官試驗)에 합격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군정법령에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공개경쟁채용시험 등 실적주의 원칙을 뒷받침할 제도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미군정기의 인사행정제도에 있어서 가장 특기할 만한 점은 미국식의 직위분류제(職位分類制)를 실시한 것이다. 당시 중앙과 지방의 문관직 전체에 적용하였던 분류규정은 직위를 그 임무와 책임 및 수행할 직무의 중요성에 비추어 등급(class)과 직무(service) 및 등별(grade)로 구분하는 방법으로, 동등한 난이도와 책임이 있는 직위는 동등한 봉급을 받게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보수의 결정은 직무급(職務給)의 기준에 따르게 하였다. 즉, 임무 · 책임 · 교육정도 및 업무상황에 따라 적당한 봉급을 지급하는 제도를 수립하였다.
「근무규정」과 「근무성적사정규정(勤務成績査定規程)」을 제정하여 근무와 휴가에 가장 통일적 기준을 결정하고, 현대적 근무성적평정인 근무성적사정(勤務成績査定)을 실시하였다. 「행정원훈련규정(行政員訓練規程)」도 제정하여 공무원훈련을 실시하였다. 훈련사업관리의 중앙기관은 인사행정처의 훈련서(訓練署)였다.
훈련은 각 부처와 도 및 서울특별시, 그리고 대행기관에서 실시하였으나, 행정원양성소(civil service trainig academy)를 따로 설치하여 교육원 교육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민주주의를 헌법원리로 채택한 제1공화국 정부가 출범되어, 1949년 8월 12일 국가공무원법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채택한 제도들은 미군정적이었다기보다 일제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미군정기에 도입했던 제도들은 거의 송두리째 버리고 일제하의 제도를 답습하였던 것이다.
민주국가이므로 몇 가지 법률상의 용어와 규정을 바꾸었지만, 제도의 골격은 일제하의 그것과 유사하였다. 일제적 잔재는 인사제도의 답습에서뿐만 아니라 공무원집단의 구성에서도 분명히 찾아 볼 수 있었다.
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 직업적인 공무원집단은 대부분 일제하의 관청과 그 주변 조직에 참여하였던 사람들, 특히 중하위직에 종사하던 관리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업무처리방식은 일제 행정하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러한 조건은 이후의 행정제도와 그 운용과정, 그리고 행정문화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크게 작용하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직의 규모는 커지고 그에 따라 새로운 인력의 보충도 늘어났지만 그러한 변동이 행정체질을 눈에 띄게 바꾸어 놓지는 못하였다.
처음 제정된 「국가공무원법」과 「정부조직법」, 그리고 부수 법령에 의해 정해진 초기의 인사제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중앙인사행정기구는 이원화하였다. 국무총리에 소속된 총무처(總務處)의 인사국(人事局)과 대통령에 소속된 고시위원회(考試委員會)가 중앙인사기능을 분담하였다. 고시위원회는 공무원임용고시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고, 그 밖의 다른 인사기능은 총무처 인사국이 관장하였다.
국가공무원의 종류는 일반직과 별정직으로 크게 구분하고 일반직의 분류에는 계급제(階級制)를 적용하였다. 일반직 공무원의 계급은 1급부터 5급까지 다섯 가지로 구분하였다.
공무원채용방법은 고시(考試:보통고시 · 고등고시)와 전형(銓衡)으로 구분하였다. 고시는 공개경쟁채용시험이며 전형은 경쟁성이 제한된 특별임용시험이다. 이때의 고시는 이른바 자격고시로서 합격효력의 시한이 없었다.
공무원의 의무 내지 행동규범을 정함에 있어서 공무원은 국민 전체의 봉사자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공무원의 집단행위를 금지하고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였다. 민주국가의 공무원이 지켜야 할 행동규범을 규정한 것은 일제하의 제도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특기할 만한 것이다.
공무원의 교육훈련을 위해 중앙에 국립공무원 훈련원을 설치하였으며, 일부 부처에서도 훈련소들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훈련사업은 매우 부진한것이었다. 교육내용은 전통적인 행정지식의 공급에 편도되었으며, 현대적인 행정지식이나 기술을 훈련시키지는 못하였다.
「국가공무원법」은 신분보장의 원칙을 천명하였다. 즉, 형의 선고, 징계처분 및 기타 국가공무원법에 정하는 사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의사에 반하여 휴직 · 정직 또는 면직당하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
공무원의 징계처분으로는 면직 · 정직 · 감봉 · 견책 등 네 가지 종류를 규정하였으며 징계처분은 각급 징계위원회의 심의를 거치도록 하였다. 이렇게 작성된 인사행정제도는 큰 변동 없이 1950년대를 지났다.
여기에 대폭적인 개편이 가해진 것은 1960년대 초이다. 1961년과 1963년에 「국가공무원법」과 부수 법령을 개정함에 따라 인사행정제도에 많은 변화가 야기되었다. 이때의 개혁으로 인해 미국식 제도가 많이 도입되었다. 그 변동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중앙인사행정기관을 강화하였다. 총무처의 변신인 내각사무처에 소청심사위원회와 비상설인 인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직위의 분류에 직위분류제를 전면적으로 도입할 것을 「국가공무원법」에 규정하고 「직위분류법」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직무조사 등 분류작업을 진행하기도 하였으나 완전한 직위분류제의 실시에 도달하는 결실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분류구조에 직위분류제적 요소의 도입이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1급에서 5급까지 구분했던 계급구조에서 2급 내지 5급까지를 각각 갑(甲)류와 을(乙)류로 구분함으로써 9단계 계급화하였다.
공개경쟁채용시험을 확대하고 자격시험제였던 공무원선발시험을 채용시험제로 바꾸었다. 조건부임용 및 시보임용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채용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사람의 연령을 제한하는 제도도 채택하였다.
승진의 한 방법으로 공개경쟁승진제도를 도입하였다. 승진계통도 한정하였다. 동종직무 내지 동종직렬에 종사하는 계통을 통해서만 승진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공무원훈련법을 제정하고 대대적인 훈련사업을 전개하였으며 정부에서 실시하는 근무성적평정제도를 채택하였다. 제안제도를 창설하였으며 상훈제도를 정비하고 보건관리제도를 창설하였다.
보수의 결정에 있어서는 직무급을 우선적인 기준으로 삼도록 하는 원칙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공무원연금제도를 수립하였다. 공무원의 기강확립을 위한 복무규범을 강화하고 인사상의 불이익처분에 대한 소총심사제도를 신설하였다.
이러한 대변혁이 있는 이후에도 크고 작은 개편들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1981년의 개혁은 그 진폭의 크기로 보아 여기서 따로 언급할 필요가 있다.
1981년에 「국가공무원법」 부수 법령을 폭넓게 개정하였다. 그리하여 공무원들의 종류를 보다 정확하고 세밀하게 분류하였으며 계급구조와 수평적 분화에 수정을 가하였다. 각 계급의 갑 · 을류 구분을 없애고 1급부터 9급을 두는 9계급제를 채택하였다.
추천요구 없이 공개경쟁채용시험 합격자를 채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승진계통의 범위를 조정하였으며 보직관리의 기준을 설정하여 직무와 사람의 적응도를 높이려 하였다. 징계절차를 거치지 않는 직위해제의 남용을 억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인사상담제도와 고충처리제도를 실시하였다. 복무규율은 강화하였으며 「공직자윤리법」을 제정하여 공직자재산등록제를 규정하였다. 청렴도라는 특성을 공무원의 근무성적평정요소에 포함시켰다.
1990년대에 일어난 변화 가운데서 중요한 것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재산등록제에 추가하여 재산공개제를 도입하였다. 고위공직자들의 재산등록내용을 ≪관보≫에 실어 공개하도록 한 것이다.
하급공무원들에 대한 총정원제도와 근속승진제를 확대하였다. 승진적체를 해소하려는 방안으로 복수직급제를 채택하여 같은 보직에 두 가지 계급의 공무원이 선택적으로 배치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고, 공개채용시험을 다원화하였다.
근무성적평정제도를 고쳐 감독자평정에 자기평정제를 추가하였다. 지방자치단체에 근무하는 국가공무원 대부분을 단계적으로 지방직화하고 지방고등고시를 실시하였다. 하위직공무원들의 정년을 연장하는 조치도 취하였다.
현재 우리 나라의 인사행정제도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바탕으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과 신분보장을 요구하는 실적주의에 원칙을 두고 있다. 실적주의적 원리를 엽관주의적 원칙과 대표관료제적 요청에 의해 수정되고 있다. 인력관리의 모형은 절충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유럽 계통의 제도와 미국식 제도가 절충되어 있는 가운데 제도운영의 실제에서는 우리의 전통적 행태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절충적인 제도라 하지만 개방적이고 직위분류제에 입각해 전문가주의적 인사행정을 펴고 있는 미국식 제도보다는 전통적인 직업공무원제에 더 근접해 있다.
우리 인사행정의 공식적 제도는 현대 인사행정의 기본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실제 운영행태까지를 포함해 보면 부족한 점이 많다. 전통관료제의 경직성과 불신관리적 속성을 반영하고 소극적 인사기능의 수행에 머물러 있다. 만연된 부패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사기저하와 개혁에 대한 소극적 저항을 포함하는 복지부동(伏地不動) 문제라든지 지역연고주의 등 각종 연고주의에 대해서도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화의 시대에 제기되는 엽관인사의 범위 재조정이라든지 지방화시대에 요구되는 인사재편이라든지 하는 문제도 인사행정체제에 많은 부담을 주고 있다.
이러한 문제 등을 해결하고, 나아가 공무원들이 누리는 직업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는 일에까지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