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사회 (Sakhal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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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한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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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구조
개념
러시아령 사할린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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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러시아령 사할린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의 사회.
개설

사할린의 지명은 13세기 몽골인들이 붙인 이름으로 ‘검은 강으로 들어가는 바위’라는 의미 또는 아이누인 말로 ‘자작나무의 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할린은 러시아 연해주(沿海州)의 동쪽 오호츠크해에 위치하고, 일본 홋가이도(北海島) 북부에 있는 섬으로, 일본어로 ‘가라후토(樺太)’라고 한다.

사할린은 1854년 러시아 영토가 되었지만, 러시아와 일본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지역으로 러시아는 죄인을 수감하는 섬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 승리하자 사할린 중간에 해당하는 북위 50°이남을 점령하게 되었다.

사할린의 기후는 생활에 불리하지만 석유와 석탄의 매장량이 많기 때문에 광산업이 발달하였고, 특히 일본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한국에서 광산근로자를 모집 또는 강제 징용하여 끌고 갔다.

내용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사할린 남부는 소련(러시아)에게 점령당하였다. 당시 이 곳에는 제8사단 병력을 포함한 일본인 36만 8,000여 명과 한국인 4만 3,000여 명이 잔류하고 있었다. 이에 연합군사령부는 소련과 협정을 맺고 사할린 거주 일본인을 1946년 12월까지 일본으로 이양(移讓)하였다. 또한 일본은 사할린에 잔류한 일본인으로 국제결혼한 여성의 이양을 위해 소련과 교섭을 하였고 그 결과 1956년 10월 2,307명의 일본인 여성을 일본으로 귀환시켰다. 이 때 일본여성과 결혼한 한국인 7,000명이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한국인은 ‘포스담선언’으로 일본인의 범주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일본으로의 이양에서 제외되었고, 결과적으로 강제로 동원된 사할린 거주 한국인들은 소련체제하에서 새로운 고생을 하게 되었다. 사할린 한국인들은 사회주의 교육을 받아야 했고 노동법을 몰랐기 때문에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또한 그들은 여행의 자유를 제한받았고, 특히 일본어 방송을 듣고 한국에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잡혀가기도 하였다.

해방 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북한은 5만여 명의 계약노무자를 사할린 연해주 캄차카반도까지 보내 작업을 하였고, 북한 영사관에서는 사할린 거주 무국적 한국인에게 북한 국적을 취득할 것을 권유하였다. 하지만 사할린 거주 한국인들은 북한 출신이 없었고 대부분이 경상남 · 북도와 전라남 · 북도에서 징발당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국으로 귀국할 목적으로 소련 국적과 북한 국적 취득을 거부하였다. 이들은 오로지 한국으로 귀환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이에 일본인 처를 따라 일본으로 귀환한 박노학(朴魯學)은 일본 동경에 ‘화태귀환한국인회’를 설립하여 사할린 잔류 한국인들의 귀환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사할린에서 귀환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탄원서를 접수하여 일본 여론에 호소하고 그들의 편지를 모아 한국에 전하며 한국 가족의 편지를 사할린에 전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65년 사할린 고르사코프에 거주하는 김영배(金永培)가 사할린 경찰서에 귀환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한 소련 입장은 한국과 외교관계가 없기 때문에 일본이 받아주면 출국시킬 용의가 있다고 하였지만, 일본은 한국이 수용하지 않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고, 한국은 사할린 한국인 문제의 원인이 일본에 있기 때문에 일본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사할린 한국인의 귀환에 책임을 져야 할 당국자들이 서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었던 것 사례이다.

이와는 달리 민간차원의 귀환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어 일본 동경에서 박노학을 돕기 위한 ‘가라후토 억류 귀환 한국인회에 협력하는 부인회’가 조직되었고, 대구에는 ‘중소이산가족회’가 조직되어 사할린 한국인들의 재회운동과 귀환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본격된 것이 1975년에 시작된 ‘사할린재판’이다. 일본 변호사협회 회원 18명은 다가기(高木健一) 변호사를 중심으로 ‘재사할린 한국인 귀환소송 변호인단’을 결성하고 한국인 4명의 명의로 일본 국가를 피고로 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1989년까지 계속된 ‘사할린재판’은 기소자 4명이 전부 사망하여 판결결과를 보지 못하고 끝났다. 하지만 64회에 걸친 구두 변론에 참가한 수십 명의 한국인을 통하여 사할린 한국인의 사정이 일본사회는 물론 국제사회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여론에 자극된 일본 정부는 적극적으로 소련과 교섭을 전개하였고 대한적십자사를 비롯한 국제 적십자사와의 협력, 그리고 민단 부인회 등의 활동으로 결국 일본 국회 내에 ‘재사할린 한국 · 조선인 문제 의원간담회’가 조직되고 이에 따른 예산이 책정되었다. 이 사이에 사할린 거주 한인이 일본으로 가서 한국 가족과의 재회가 이루어졌다. 또한 1989년 4월에는 일본관계자와 한국관계자 15명이 언론인을 대동하고 사할린을 방문하였고, 그 뒤 한국 국회의원이 사할린을 방문하고 적십자사의 주선으로 유지노 사할린스크에서 서울로 직행하는 전세비행기가 운행하여 사할린 한국인의 모국방문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사할린 한인 사회는 고려인협회와 고려인문화센터가 있다. 그리고 특이한 조직으로 ‘이산가족회’와 ‘노인회’가 있는데, 유지노 사할린스크에만도 구역마다 노인회가 있고, 시노인회, 도노인회가 있다. 또한 한국어 방송을 들을 수 있고, 『신고려일보』라는 신문이 있다. 한국 학생이 많이 있는 학교에는 예컨대 제4중학과 같이 한국계 학생들을 모아 방과 후 한글을 가르치는 한글반이 있다. 유지노 사할린스크 국립사범대학에는 한국어학과가 있어 한국어 교사를 양성하고 한글 이외에 한국 경제 수업 등을 통해 한국과의 유대를 돈독히 하고 있다.

사할린 거주 한인들은 교육을 받고 현지에 배속된 자녀를 따라 사할린 대안(對岸)에 있는 연해주와 하바로브스크주에 진출하여 러시아 원동(遠東) 지역은 사할린 출신자의 무대처럼 되어 있다. 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로브스크에 거주하는 사할린 출신자는 사할린에 거주하는 부모 형제의 생일에 사할린을 방문하기도 하고 한국을 다녀온 친척을 보러 가기도 한다. 따라서 사할린과 그 주변 지역은 한국인들의 생활의 터전이 되어 있다.

현황

사할린 한인 규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국가총동원령으로 인해 약 15만 명이 강제동원되었다가 2차대전 말기에 10만 명이 일본으로 재배치됨에 따라, 1945년 잔류 인원은 약 4만 3,000명으로 알려져 있다. 1989년에는 3만 5,191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사할린 전체 인구(70만 명)의 5%에 해당하였다. 2002년 러시아 비공식 인구조사에 따르면 3만 378명이 거주했고, 2005년에는 한인 1세 인구만 3천 547명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1992년부터 추진된 영구귀국사업으로 2007년까지 2,221명의 한인 1세가 한국으로 영주귀국하였다.

2008년 ‘지구촌동포연대’가 조사한 사할린 한인 규모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 1만 6천 명, 홈스크에 3천 100명, 코르사코프에 2천 700명, 뽀로나이스크에 2천 500명 등으로 전체 2만 8,260명이 거주하고 있다.

1938년부터 강제로 사할린에 이주된 대부분의 사할린 동포 1세들은 사망하였고,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후반 두 차례에 걸쳐 영주귀국이 있었으나 그 수는 미미한 실정이다. 정부는 영주귀국을 희망하는 사할린한인의 귀환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사할린한인지원특별법안 공청회 자료집』(국회의원연구단체 사할린 포럼, 2010. 11. 17)
『세계의 한민족-독립국가연합-』(권희영, 통일원, 1996)
『슬픔의 섬 사할린의 한국인, 전후 책임의 배경』(각전방자(角田房子) 저, 김은숙 역, 조선일보사, 1995)
『재소한인-인류학적 접근-』(이광규·전경수, 집문당, 1993)
『망향 40년』(삼전영빈 저, 박재영 역, 성정출판사, 1983)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현황 그리고 과제」(배덕호, 『2008 교포정책포럼』요약발표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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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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