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점당한 뒤 동경유학생들의 중심연락기관이었던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가 해산당하여 유학생들은 통합된 학생기구가 없어 불편을 겪고 있었으며, 일제당국에 연락기구설치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의 대안으로 고안해낸 것이 국내 각 도단위의 친목단체였다. 그리하여 경기도와 충청남북도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 밖에 전라남북도를 대표하는 호남다화회(湖南茶話會) 등 7개 단체가 있었다. 이러한 친목단체에 간사를 두고 1912년 4월 초대간사장에 김병로(金炳魯)를 선출하였다.
이들은 그동안 각 도별로 연락기관을 설치한 뒤 활동하다가, 조선유학생총회에 흡수되었다. 이 총회의 초대회장에는 삼한구락부에도 관계를 맺고 있던 정세윤(鄭世胤)이 선출되었다. 이는 대한흥학회가 철폐된 지 3년만의 일로 모든 유학생기구가 다시 재건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