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진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공조판서, 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기부(起夫)
송현(松峴), 범허재(泛虛齋)
이칭
향일당(嚮日堂)
시호
성안(成安)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93년(성종 24)
사망 연도
1564년(명종 19)
본관
목천(木川)
주요 관직
예문관검열|사헌부장령|형조판서|공조판서|지돈녕부사
관련 사건
임꺽정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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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공조판서, 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목천(木川). 자는 기부(起夫), 호는 송현(松峴) · 향일당(嚮日堂) · 범허재(泛虛齋). 증 이조판서 상영부(尙英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후(虞侯) 상효충(尙孝忠)이고, 아버지는 찰방(察訪) 상보(尙甫)이다. 어머니는 연안김씨(延安金氏)로 박사(博士) 김휘(金徽)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매부인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의 집에서 자랐다. 15세가 되어도 공부에 뜻을 두지 않고 말 달리고 활 쏘기만 하여 이웃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자 이에 분발, 학업에 힘썼다.

1516년(중종 11)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이어 1519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곧이어 봉교(奉敎) · 예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특진되었다.

1528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올랐는데, 당시 영경전(永慶殿)에서 거행된 세자의 친제(親祭)에 질병으로 불참했다가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그 뒤 다시 장령 ·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등을 역임하면서 지방 관리의 탐학을 제거할 것과 농촌 진흥책을 제시하였다. 1533년 대사간이 되었고 이어 부제학 · 좌부승지를 역임하면서 언론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 뒤 형조참판을 지내고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민정을 잘 다스렸다.

1539년 중종의 특명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형조판서가 되었는데, 전례가 없는 특진이라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한성부좌윤으로 체직되었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이어 한성부판윤을 연임하고 1543년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병조판서가 되어 국방을 총괄하였다.

특히 중종의 신임을 얻어 우찬성(右贊成)에 제수되었으나 대간의 탄핵으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체직되었다. 곧 이어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윤원로(尹元老)와 결탁했다 하여 인종 즉위와 함께 경상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한 후 이기(李芑) 등이 실권을 장악하자, 이기의 천거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후원으로 병조판서에 중용되어 군정 확립에 힘썼는데, 특히 마정(馬政)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실시에 노력하였다.

1548년(명종 3)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우찬성이 되었으나, 질병으로 사임하였다. 이듬해 이기 · 윤원형(尹元衡)의 추천으로 이조판서가 되었고, 이어 우의정에 올랐다.

이때부터 이기 · 심연원(沈連源) 등과 더불어 국정을 주관했는데, 문정왕후가 주장한 양종(兩宗) 설립에 온건론을 펴서 유생들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그 밖에 부민고소법(部民告訴法)을 실시해 민원을 살피기도 하였다. 1551년 좌의정에 올랐고, 1558년 영의정이 되어 그 뒤 5년 동안 국정을 총괄하였다.

재임하는 동안 황해도 평산(平山) 일대에서 임꺽정(林巨正)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평정시켰다. 좌의정 이준경(李浚慶)과 더불어 사림을 등용하는 데 힘썼다. 뒤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전임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청렴하고 관후 인자한 명상(名相)으로서 조야(朝野)의 신망이 두터웠으나, 만년에는 윤원형 · 이기 등 소윤(小尹) 일파와 어울려 사림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시호는 성안(成安)이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인종실록(仁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청강집(淸江集)』(이제신)
『범허정집(泛虛亭集)』
『인재집(忍齋集)』(홍섬)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대동야승(大東野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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