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상해청년단이라고도 한다. 당시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에 있던 임재호(任在鎬)는 1919년 5월 동지로 안병무(安炳武)·연충렬(延忠烈)·김석(金晳) 등을 모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대한민청년단을 조직할 것을 강조하자 모두 크게 찬성하고 단체명칭에 관하여 갑론을박하다가 대한민청년단으로 확정하였다.
이 단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원, 상해 거주 한인들의 대동단결촉구, 상해 한인학생과 유학생의 학문진흥, 교민의 대동단결을 통한 항일구국의식 제고를 활동목표로 삼고, 그에 따른 행동지침과 강령을 결정하였다.
이 단체의 임원을 보면 단장에 여운형(呂運亨), 부단장에 유경환(柳景煥), 총무에 임재호, 기타 평의원에 연충렬·선우 혁(鮮于爀) 등이 선임되었다. 임시정부 상해시대를 끝내는 1932년 후반기에는 경제적 곤란으로 인하여 거의 중단상태에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