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8월 1일 국내로부터 중국 상해로 망명한 이만영(李晩榮) 등이 동지 10여명을 모아 상해의 프랑스 조계(租界) 내에서 소년운동의 집중화와 조국독립을 목표로 조직하였다.
당시 송병조(宋秉祚)가 이사장으로 있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소년조직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이만영을 집행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간부로는 옥인섭(玉仁燮)·조이제(趙利濟)·차영선(車永善)·김양수(金良洙)·이규홍(李圭鴻)·박성근(朴成根)·조시제(趙時濟) 등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독립운동의 분발을 촉구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전단을 10회에 걸쳐서 살포하였으며, 한일간의 역사적 관계를 담은 유인물을 제작, 살포하였다.
이들은 1933년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대대적인 민족대회를 열기 위하여 「3·1기념축하절」이라는 전단을 뿌리고 거족적인 대회를 준비하였으나 기대하던 바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어 같은 해 8월 29일 「국치기념」이라고 제목을 붙인 전단을 배포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34년 3월 1일 또다시 3·1운동을 환기시키는 전단을 만들어 상해교민사회에 선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적극 지지, 후원할 것을 호소하였다. 1934년 후반기 이후 뚜렷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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