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프랑스 조계(租界) 안에서 박성근(朴成根)과 박창세(朴昌世)의 차남 제건(濟建) 등 20여 명의 소년이 모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며 광복투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930년 4월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 해 9월 독지가의 재정적 지원을 얻어 용구를 구입하고 제복을 정제하는 등 항일투쟁의 결의와 자세를 일신하고, 때때로 심신의 단련을 위해 상해 근교의 산간 지역을 내왕하면서 야영도 실시하였다.
매년 3·1운동을 기념하는 행사를 임시정부가 주관해 치를 때, 기념식장 내외의 경호를 자발적으로 담당해 건물의 보안과 임시정부 요인의 신변을 안전하게 호위하였다. 일정한 사무실은 없었으나, 1932년 현재 상해 프랑스 조계 망지로(望志路) 218호 등에 연락장소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소년척후대의 박성근 등은 연락장소나 야영할 때를 놓치지 않고 독립투사의 자제들에게 우리 나라의 역사를 강의하였다. 그 중에서도 한일관계사를 집중적으로 인식시켜 우리 문화가 일본사 발전에 기여한 사실을 조목별로 강조, 이해시켰다.
김구(金九)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이 소년척후대를 집중적으로 지도, 후원해주었다. 소년들에게 장차 무장투쟁을 직접 지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932년 4월 29일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윤봉길(尹奉吉)이 투탄의거를 성공시킨 이후 임시정부 자체가 상해를 떠났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윤봉길 투탄의거 뒤에 책임자 박성근도 김구를 따라 난징(南京) 등지로 떠나 항일투쟁을 지속하지 못하였다. 상해 동자군(童子軍)의 후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