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한국유학생은 점차 늘고 있었다. 특히 일본 동경(東京)의 대지진 이후 급증하였다.
이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공부하기에 최적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해, 여운형(呂運亨)·이유필(李裕弼)·윤기섭(尹琦燮) 등 10여 명이 만들었다.
1924년 2월 2일 정기총회를 개최하였다. 회장 신형철(申瀅澈)의 개회사로 시작해 사업 보고에 이어 임원을 전부 개선하였다.
회장에 난화학원(南華學院)최충신(崔忠信), 총무에 퉁지대학(同濟大學)변동화(邊東華), 서기에 난화학원 이재곤(李在坤), 재무위원에 함부리스스쿨 김일(金逸), 사교위원에 후이링학교(惠靈學校) 김규택(金奎澤), 운동위원에 퉁지대학 김상규(金相珪) 등을 새로 선임하였다.
그 뒤 규칙 개정과 난징(南京) 원정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다. 상해 교민단학무위원회의 대표 김두봉(金枓奉)·정광호(鄭光好)이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건축에 대해 연설하자, 유학생회에서도 학교 건축에 협조,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 해 9월 25일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회장 최충신의 진행으로 규칙을 수정하였다. 주요 내용은 회장, 총무제를 집행위원회로 고치고, 정기총회는 1년에 두 번 하던 것을 한 번으로 줄인 것이다.
새로 임명된 집행위원은 조윤관(趙允寬)·최남식(崔南植)·박용철(朴容喆)·최충신·변동화·박진(朴震)·이화천(李花天)·진애경(秦愛敬)·박해봉(朴海峰) 등 11명이었다. 1932년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날 때까지 존속,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