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부여(扶餘). 아버지는 목사 서익(徐益)이다.
서자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었으나 서얼차대(庶孼差待)로 관리에 등용되지 못함을 불만으로 여겨오던 중, 같은 서출인 박응서(朴應犀)·심우영(沈友英)·박치의(朴致毅)·박치인(朴致仁)·이경준(李耕俊)·김평손(金平孫) 등과 소양강 부근을 근거로 강변칠우·죽림칠우(竹林七友)를 자처하며 시와 술로 교유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살해하고 은 600∼700냥을 강탈하다가 체포되었다. 이때 목숨을 살려준다는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의 꾐에 빠져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조부인 김제남(金悌男)과 모의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하였다고 허위진술을 하여 계축옥사를 불러일으키고 자신도 죽음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