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달성구 출신으로, 서광용(徐光容)의 아들이다.
1910년 8월 이재희(李在熙)와 진주의병대장 노응규(盧應奎)의 아들 노수덕(盧修德) 등과 비밀결사 상의회(商議會)를 조직, 아버지 서광용과 김기홍(金箕鴻) 등이 희사한 기금 약 8,000원으로 독립운동과 의병가족돕기운동을 전개하였다.
1917년 9월 상해(上海)와 만주에 이현수(李賢壽)·노수덕을 파견, 이시영(李始榮) 등과 연락을 취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 보내 주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향리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대구 재전당서포(在田堂書鋪) 출판부에 재직하면서 3·1독립선언서와 구호를 인쇄해 군중에게 배포하다 대구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20년 8월 임시정부 내무부 비서 정해민(鄭海珉)으로부터 임시정부 독립공채모집위원(獨立公債募集委員) 등의 임명장을 받고 공립공채 1,000원을 포함한 약 5,500원을 모금, 이를 정해민을 통해 임시정부에 보냈다.
이와 동시에 대구 재전당서포와 정팔진(丁八鎭)의 집을 근거지로 하고 임시정부 포고문과 일본인 및 관헌에 대한 경고문 등 수십 종의 독립운동 관계 인쇄물을 유인, 배포하였다.
1921년 10월에는 이현수와 같이 등사본 통신문 형식의 지하신문 『자유신보(自由申報)』를 발간, 각 언론기관에 보내는 등 독립운동을 홍보하는 데 노력하였다. 영문판까지 발간하여 외국인에게 일제의 야만적 식민 통치 사례를 폭로, 규탄하였다.
한국독립청원서를 만들어 미국 선교사를 통해 화부(華府)에서 개최하는 세계군축회의인 태평양회의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의 효과는 크게 나타나지 않았으나,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비참하게 탄압받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세계 자유인에게 홍보하는 성과는 거둘 수 있었다.
1923년 1월 10일에 붙잡혀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 뒤 여러 번 상해로 망명하려 했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 떠나지 못했다. 결국 계룡산으로 피신, 동흥의숙(東興義塾)을 세워서 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