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읍지(舒川邑誌)』의 저자 및 편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서천읍지』는 1901년(광무 5)에 편찬하여 간행하였다.
수록 항목은 방리(坊里), 호구(戶口), 도로, 건치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형승(形勝), 성지(城池), 관직(官職), 산천, 성씨(姓氏), 풍속(風俗), 능침(陵寢), 단묘(壇廟), 공해(公廨), 제언(堤堰), 창고(倉庫), 물산(物産), 교량(橋梁), 역원(驛院), 목장(牧場), 관애(關阨), 봉수(烽燧), 누정(樓亭), 사찰, 고적(古蹟), 진보(鎭堡), 인물, 원전(元田), 진공(進貢), 조적(糶糴), 전세(田稅), 대동(大同), 균세(均稅), 군병(軍兵) 등 34개로 구성하였다.
특기할 사항은 읍지 끝부분에 ‘서천군사례(舒川郡事例)’를 첨부하였는데, 내용은 읍치(邑治)와 산천, 성지, 공해, 관방(關防), 봉수, 단묘, 방리, 관직, 유림(儒林), 향임(鄕任), 장교(將校), 인리(人吏), 군총(軍摠), 원장부(元帳付) 등으로 구성하였다. 그 뒤에 ‘서천포장암진지(舒川浦長巖鎭誌)’와 ‘서천포사례(舒川浦事例)’를 수록한 점도 주목된다. 물산과 진공, 전세, 대동 등의 경제 관련 항목과 군병 등의 군사 관련 항목이 자세하며, 특히 ‘서천군사례’의 군총과 원장부 항목은 조선 후기의 지방재정과 군사제도를 파악하는 데 요긴한 자료이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전국 지리지 『여지도서(輿地圖書)』는 29개 항목으로 『서천읍지』와 항목 구성에 있어 차이가 난다. 『서천읍지』에는 『여지도서』에 없는 8개 항목[호구, 성지, 능침, 목장, 봉수, 누정, 진보, 원전]이 추가되었고, 『여지도서』에는 『서천읍지』에 없는 한전과 수전, 봉름 항목이 별도로 구성되어 있다.
『여지도서』와 『서천읍지』의 항목 구성이 차이 나는 이유는 시기별 편찬 의도와 방향이 달랐기 때문이다. 즉 18세기의 전국 지리지와 19세기의 지방 읍지 편찬관이 변화하였으며, 그에 따라 읍지의 편찬 의도와 방향이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두 문헌을 비교 검토하여 조선 후기 지방의 군제나 전제, 세제 등의 변화상을 파악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 서천 지역의 향토사를 연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조선시대 광범위하게 편찬된 읍지는 지방 각 읍의 지지(地誌)인 동시에 지방사이자 행정 사례집이다. 『서천읍지』 역시 조선시대 서천 지역의 지방행정과 경제, 사회적 배경 및 지방의 특징과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