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치안 및 징수 등 인민 통치를 목적으로 지역 주민의 가족과 그 구성원을 ‘호(戶)’와 ‘구(口)’로 파악하였다. 호구 파악 방법은 첫째, 법제로 가족을 설정하여 개별 호별로 호 대표자와 구성원들의 가족관계 및 인적 사항을 일일이 기록하는 ‘호적(戶籍)’을 몇 년마다 한번 씩 정기적으로 작성하는 것이다. 둘째로, 일정한 행정구획을 설정하고 호마다 구성원이나 국역(國役)의 통계적 파악을 나열하거나, 해당 구역 전체 호구 수를 집계하는 ‘호구부(戶口簿)’를 작성하는 것이다. 국가의 이러한 일률적인 인신 파악에 근거하여 집권적인 통치를 수행하고자 한 것이다.
동아시아 고대사회로부터 왕조국가는 백성을 가족 단위의 일률적인 형태로 파악하여 황권(皇權) 혹은 왕권(王權) 하에 집권적으로 장악하고자 하였다. 가족을 호로 편제할 때의 ‘가(家)’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혈연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친인척이나 노비(奴婢) 등, 그 가족에게 부속된 개별 인구가 포함되었다. 따라서 ‘가’의 대표자인 ‘가장(家長)’은 아버지이거나 아버지와 같은 ‘가부장(家父長)’으로 존재하고, 그가 국가와 사회에 대해 ‘가’를 대표하여 책임과 의무를 지는 이념으로 규정되었다.
행정구획별로 호구를 파악하여 국가적 부담을 가족과 지역 사이에 균등하게 할당하고자 하는 통치방법은 이후로도 중국과 한국의 왕조국가에 지속되었다. 특히 조선왕조는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3년마다 한 번씩 전국적으로 호구를 조사하여 군현별 ‘호적대장(戶籍大帳)’을 작성하도록 하고 지역마다 ‘호구 총수(戶口總數)’를 파악하여 재정 및 군역 운영에 활용해왔다. 대한 제국(大韓帝國) 시기에는 새로운 양식으로 매년 호구조사를 실시하여 호구 파악을 이전보다 철저히 하고자 했다. 이것을 ‘광무 호적(光武戶籍)’, 혹은 이전의 ‘구호적’에 대해 ‘신호적’이라 불렀다.
일본은 고대국가가 광범위하게 호구를 파악하였으나 중세에 그만두었다. 그러나 명치유신(明治維新)을 계기로 집권적인 국가를 형성하고자 할 때에 다시 전국적인 호구 파악을 실시하게 되었다. 19세기 말의 이 ‘명치 호적(明治戶籍)’은 20세기에 들어 대만과 한국을 식민지화할 때에 식민지 주민의 호구 파악 양식으로 활용되기에 이른다. 이때의 호구 파악은 가족과 지역주민의 자율성이 거의 배제된 강제적인 것이었다.
조선왕조는 호단위로 구성원의 인적사항을 기재하는 양식을 1470년대에 편찬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에 ‘호구식(戶口式)’으로 제시하고 있다. 제시된 호구의 전형은 호 대표자 부부와 자녀에 더해 노비 및 고공을 호의 구성원으로 한다.
호 대표자에게는 직역(職役) 및 신분, 성명, 나이, 출생년도, 본적, 사조(四祖)를 기재한다. 처는 이름을 쓰지 않고 성씨에 호칭을 쓰고 그 이하는 남편과 같이 나이, 출생년도, 본적, 사조를 기재한다. 여기서 사조란 “부, 조, 증조와 외조”를 가리킨다. 아버지를 포함한 4명의 선조는 주로 생존하지 않는 자들로, 단지 호 대표자 부부의 신분 연역을 확인하기 위한 기재이다. 따라서 사조 각자는 직역, 성명, 본적(외조에 한함)을 기록한다. 고려와 조선 왕조의 신분은 부계만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오히려 모친의 신분이 본인의 신분에 결정적이다.
『경국대전』의 ‘호구식’에는 호 대표자가 관료이며 그 처가 사족의 여성임을 말하는 ‘씨’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를 표본으로 제시하고 부부 모두에게 사조를 기재하도록 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은 사조를 다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아는 데까지 기록하도록 각주를 달아놓았다. 동거하는 자식들도 직역과 이름, 나이, 출생년도를 기재하는데, 역시 각주로 사위가 있는 경우에는 그의 인적 사항을 쓰도록 했다. 자식이 혼인하면 아버지의 호와 별도로 분호(分戶)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딸의 경우는 혼인 초에 당분간 친가에 거주하는 관례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노비와 고공(雇工)에게는 신분, 이름, 나이, 출생년도 간지를 기록하도록 했다.
조선시대 중후기 호적 장부에는 관료 가족이 아니더라도 관료 및 군역자를 포함한 양인(良人) 모두는 호구식에 맞추어 호구를 등재하고 있다. 노비 가족이 독립된 호로 구성하는 경우에는 그 부부가 사조를 모두 기록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며, 단지 부모를 기록하여 신분적 연원을 밝히는 데에 그친다. 독립호를 구성한 노비는 귀속되는 주인이 누구인지를 부기하고 있다.
지방 군현에서 삼 년마다 작성되는 호적 장부(戶籍帳簿, 호적대장이라 함)의 말미에는 호적 본문에 등재된 호구 총수를 기록하고 남녀 및 직역별 인원수를 집계하는 ‘도이상(都已上)’ 통계가 기록된다. 호적대장은 여러 부가 작성되어 한성부와 감영에 보고되는데, 주로 이 통계에 근거하여 중앙 및 지방의 호구 정책이 펼쳐진다. 군현 사이의 재정 및 군역, 호역을 할당하거나 부담을 조정하는 데에 활용됨으로써 호구조사가 지속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18세기 말에는 전국의 군현 및 산하 면 단위에 이르는 호구 수를 『호구 총수(戶口總數)』로 편찬, 공표했다. 재정과 군역 운영상 당시의 지역마다 재원의 액수를 고정적으로 파악하는 총액제 운영의 일환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18세기부터 19세기 말 대한제국 시기 직전까지 전국 규모 호구 수에는 큰 변동이 없다. 호구조사는 국가가 시행하는 것이지만, 지역민의 자발성과 내부의 자율적 조정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 중앙정부는 호구 정책을 지방 내부의 자율성에 의지하고 있었으며, 지역 간의 조정과 할당을 시행하는 데에 현존하는 모든 호구를 호적대장에 등재할 필요는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재정 및 군역 운영과 관련한 조선왕조의 호구 파악은 모든 가족과 인구를 장부상에 등재토록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에 본적지 중심의 호적을 작성하면서 현존하는 많은 가족과 인구가 파악되기 시작했다.
현대사회에는 근대적인 인구조사를 시행하게 되었으나, 동아시아 각국은 이와 더불어 여전히 가족을 단위로 하는 호적을 작성해 왔다. 한국의 경우는 거주이동과 관계없이 연장자 남성을 호주로 하여 출신지 중심의 혈연적인 가족을 등록하는 ‘호적’과 동거하는 세대별 가족을 등록하는 ‘주민등록’으로 이원화되어 있었으나, 호주제 폐지와 함께 전자의 호적 등록은 사라졌다.
호구, 호구식은 중앙집권적 전제국가가 인민의 일률적인 파악을 위하여 시행되어 온 것으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의 독특한 역사 경험을 대표한다. 근대사회의 획일화 이면에 존재하는 다양한 역사 경험의 축적을 발견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