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9월에 칙령(勅令)으로 ‘호구조사 규칙(戶口調査規則)’이 반포되고 곧이어 ‘세칙(細則)’이 반포되었다. ‘호구조사 규칙’에는 “원호(原戶)를 은닉하여 누적(漏籍) 하거나 원적 내의 인구를 고의 누탈(漏脫) 하는” 행위를 처벌하겠다고 하였다. 나아가 ‘호구조사 세칙’에는 “호주(戶主)의 부모 · 형제 · 자손이라도 각호에 분거(分居)하여 호적이 별유(別有)할 때는 해당 호적에 들이지 아니하여 인구가 중복되지 않게” 하라고 하여 실제의 인구들을 모두 호적의 호구로 기재할 뜻을 천명했다.
조선왕조 시기의 구호적은 호별로 제출된 주민의 ‘ 호구단자(戶口單子)’를 수리하여 지역별로 호구 수를 조정하고 주소를 확정하여 면 단위, 군현 단위의 책자로 옮겨 적는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의 광무 호적은 구호적에서 ‘호구단자’를 제출하는 것과 같이 한 호에 한 장의 호적표를 작성하여 지역단위 호적 장부로 작성되기까지의 호구 수의 조정 과정을 뛰어넘어 바로 중앙정부로 수령되는 체계를 이상으로 했다.
광무 호적의 호번 양식은 호적표마다 도군명이 최상단에 기재되고 그 하단에 면리동(面里洞) 행정구획과 통호(統戶)의 번지수가 기재되었다. 간혹 이와 함께 왼쪽 첫 줄에 ‘호적표 제○○호(戶籍表 第○○號)’라고 별도의 호번을 기재하기도 한다.
호적표의 구성은 ‘호주(戶主)’라 하여 호의 대표자를 명기하고 그의 가족을 ‘동거친속(同居親屬)’으로 구분하여 기재하고 있다. 기존의 호적에 그러한 표기가 없고 그러한 구분이 불명확한 것과 대조된다. 그와 관련하여 기존의 호적에 호의 대표자 이외에 모, 처, 며느리, 사위 등의 혼인관계로 맺어진 자들에게도 부 · 조 · 증조 · 외조라는 ‘사조(四祖)’가 기재되던 것과 달리 호적표에는 호주 1인에게만 사조를 기재하도록 했다.
또한 호적표에는 호내 구성원 개개인에게 기재되던 ‘직역(職役)’에 대신해서 호주에게만 ‘직업(職業)’란을 설정했다. 이것은 조선왕조 구호적의 ‘직역’과 같이 국가적 공공업무와는 상관 없이 기재되었지만, 그렇다고 근대적인 의미의 직업과도 거리감이 있었다. 거기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구분되는 동아시아 전통적인 인민의 직분(職分) 인식이 적용되었다. 그리고 구성원 가운데 친인척이 아닌 자들은 ‘기구(奇口)’라 하여 남녀 인명수만 기재하였다.
이 호적표가 기존의 호적과 다른 것은 ‘가택(家宅)’란을 설정하여 가옥의 소유임차관계-‘기유(己有)’와 ‘차유(借有)’-와 가옥의 형태 및 규모-‘와가(瓦家)’ ‘초가(草家)’의 구분과 칸수(間數)-를 기재한다는 점이다. 호주의 직업이 ‘사’라고 해서 모두 가옥의 규모가 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직업을 ‘사’로 기재하는 호주들은 대체로 큰 가옥 규모를 소유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분적으로도 상위 계층을 이루는 경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갑오개혁 이후의 호세(戶稅)는 호에 대한 기존의 여러 가지 부과를 일원화하여 중앙 재무 기관에서 일률적으로 징수하는 세제 개편이었다. 광무 시기의 호세 수취와 관련해서 수세가 가능한 현실적인 호의 누락 없는 엄밀한 파악이 종용되었으며, 그것이 새로운 호적 작성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호적 작성을 둘러싼 갈등은 호구 재원에 대한 중앙정부의 중앙집권화와 지방 관아의 지방 경비 마련의 어려움으로 나타났다. 호구조사에 대한 지방차원의 자율성도 억제되었다. 그러나 호구 수 증대를 기대하는 호구조사의 결과로써, 대한 제국기의 전국적인 호구 수는 이전보다 현격히 감소한 통계를 보인다. 전국 규모 호구 수가 증가하기 시작하는 것은 1906년(광무 10) 이후 호세와 관계없음을 전제로 한 통감부의 강제적인 호구 파악과 1909년(융희 3) 이후 일본식 호적 형식을 빌린 ‘민적(民籍)’의 작성을 계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