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전라도관찰사로 재직하던 1833년(순조 33) 4월부터 1834년(순조 34) 12월까지, 전라도 감영, 즉 완영(完營)이 있는 완주(完州; 전주)에서 지방 통치 및 재정 운영에 관여하여 수행한 공무를 일기 형식으로 서술한 기록이다.
『완영일록』에는 ‘자연경실장(自然經室藏)’이라는 판심이 붙어있다. 서유구 가문의 가장(家藏) 서적들은 ‘풍석암서옥(楓石庵書屋)’ 혹은 ‘자연경실장’이라는 판심이 있는 원고에 쓰인 경우가 많다. ‘자연경실’은 서유구가 수원유수를 지낸 뒤에 이주한 번계(樊溪, 서울 강북구의 번동)의 서재 이름이다. 이곳에서 서유구의 기왕의 저작들을 모으고 집대성하였다. 『완영일록』은 2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의 공무를 필사하여 전부 8권으로 책을 묶었다. 감영에서 발송되는 공문들은 송달되는 기관이나 문서 형식에 따라, 상부기관에 업무를 보고하는 「장계(狀啓)」, 「보첩(報牒)」, 도내 행정 및 군사기관과 왕래하는 「이문(移文)」, 「관문(關文)」, 「사통(私通)」, 공문에 감사가 답하는 「제(題)」, 하부기관에 대한 명령서인 「감결(甘結)」, 「전령(傳令)」등의 고문서명을 가지고 그대로 등사되어있다.
풍석(楓石) 서유구는 서울 경화사족 집안에서 대제학 서명응(徐命膺)의 손자, 이조판서 서호수(徐浩修)의 아들로 1764년(영조 40)에 태어났다. 1790년(정조 14)에 나이 27세로 증광문과에 급제한 이후로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연암(燕巖) 일파를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실학적 유교 지식인들에게 많은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관직에 있거나 향촌에 물러나 있을 때에나 농사를 실험하고 재정 정책적으로 실천해갔으며, 말년에는 그것을 종합하여 농업지식을 집대성하기에 이르렀다.
『완영일록』은 서유구가 전라도관찰사 재임기간 동안 기록한 메모와 모아놓은 공문서들을 이후에 다시 정서하여 책자로 만든 것이다. 이 책은 1833년(순조 33) 4월 10일에 전라도관찰사로 임명 받아 그날로 출발하여 15일에 여산(礪山)에서 신구 감사의 교대 절차를 시행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전라감사의 임무를 끝내기 직전인 1834년(순조 34) 12월 30일까지 기록되었다.
여기에는 전라도 전역으로부터의 조세 징수, 수송 상납 등의 재정업무는 물론, 농업 재생산 유지를 위한 권농 정책, 농사 관리, 진휼 정책에 이르기까지 국가 재정 정책과 이념을 지방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서유구의 지방관으로서의 면모도 관찰할 수 있다.
이때에 진휼 정책을 수행하면서 구황작물인 고구마 재배를 시도하고 강필리(姜必履)의 『감저보(甘藷譜)』와 김장순(金長淳)의 『감저신보(甘藷新譜)』, 감자에 관한 중국과 일본의 기록 등을 참고하여 『종저보(種藷譜)』를 편찬, 실제로 재배를 실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완영일록』은 이어서 수원유수(水原留守)를 역임할 때의 공무 일기인 『화영일록(華營日錄)』과 짝하여, 도의 관찰사와 군현의 수령, 유수부의 유수라는 지방관으로서 실학적 정치이념을 실천한 서유구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농업기술을 비롯하여 서유구가 이루어낸 학문적 성과가 지방의 통치 현장에서 실현되는 사례를 통해 서유구의 학문적 체계를 관련지어 검토하고 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점이 가장 큰 자료적 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