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수원유수로 재직하던 1836년(헌종 2) 1월부터 1837년 12월까지 지방 통치 및 재정 운영에 관여하여 수행한 공무를 일기 형식으로 서술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일기 형식으로 간략한 공무 일정을 기록하고 통치 및 재정 업무와 관련하여 타 기관에 보고하거나 수령한 공문서, 수원유수부 산하 통치기구에 지시한 지령들을 등재하고 있다.
『화영일록(華營日錄)』에는 ‘자연경실장(自然經室藏)’이라는 판심이 붙어있다. 서유구 가문의 가장(家藏) 서적들은 ‘풍석암서옥(楓石庵書屋)’ 혹은 ‘자연경실장’이라는 판심이 있는 원고에 쓰인 경우가 많다. ‘자연경실장’은 서유구가 수원유수를 지낸 뒤에 이주한 번계(樊溪, 서울 강북구의 번동)의 서재 이름이다. 이곳에서 서유구의 기왕의 저작들을 모으고 집대성하였다.
『화영일록』은 서유구가 수원유수 재임 기간 동안 기록한 메모와 모아놓은 공문서들을 이후에 다시 정서하여 책자로 만든 것이다. 이 책은 서유구가 나이 73세에 수원유수로 임명되는 1836년(헌종 2) 1월 11일의 그해, 정월 초1일의 기록으로 시작된다. 1월 15일에 의례적인 사양의 뜻을 상소하고 26일 임명하는 교서(敎書)를 정식으로 받아 이튿날 바로 부임을 고했다. 그날로 수원으로 가서 화령전(華寧展)을, 29일에는 건릉(健陵)과 현륭원(顯隆園)을 봉심(奉審) 했음을 기록하고 보고서를 올렸다.
이 이후로 유수부의 업무를 보고하는 장계(狀啓), 그와 관련하여 내려온 전교(傳敎) 등의 문서, 주변의 군현과 도와 주고받은 관문(關門), 사통(私通), 수원유수부 산하의 통치기구들과 향촌에 포고한 감결(甘結)과 각종 전령(傳令)들이 간단한 공무 기록과 함께 날짜별로 등재되어 있다. 이것은 이듬해 1837년(헌종 3) 12월 2일에 중앙의 지경연(知經筵)으로 임명되어 12월 12일에 수원을 떠날 때까지 기록되었다.
『화영일록』에 등재된 공문서 가운데 일상적인 수원의 행정 보고로는 화령전과 건릉, 그리고 현륭원에 관한 것이 많다. 공문서 내용상 일상적인 작황 보고인 농형(農形)과 연분(年分) 등의 장계를 제외하더라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재정 관련 기사들이다. 이 이외에도 환곡 운영과 관련하여 각 도(道)에서 수원유수부로 수납되는 모곡의 감소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 수원부의 농업과 재정상황에 대해서 서유구는 흉작이 거듭되어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의 삼정(三政)이 모두 문란해지고 민은 궁핍하며 토지는 황폐하다고 하며 그 회복 방법을 제시했다. 그 가운데에 가장 빈번한 지시는 제언이나 보(洑) 등의 수리시설과 농구를 미리 유의하고 농기를 놓치지 않을 것, 지력을 다할 것을 강조하는 ‘권농(勸農)’ 전령이다.
서유구의 재정, 군역 운영은 평소의 경험으로부터 체계화된 농학의 실현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면서 전개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화영일록』에 기록된 서유구의 공무 기록은 그의 실학적 정치이념을 농업생산의 안정화를 꾀하는 농학을 통하여 실현하려는 실천적 활동으로 평가된다.
경기지역 공무 일기가 흔치 않은 사료 현존 상황에서도 『화영일록』은 자료적 가치가 높다. 이러한 지방관의 공무 기록은 지방에서 중앙으로 보고되고 중앙에서 논의되는 정치 안건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현장의 통치 현실을 알려준다. 더구나 조선의 풍토에 적합한 그의 농학은 그 이념적 근거인 경학(經學)을 지방통치에 실천하는 과정에서 도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