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숙옥(叔玉). 한성부윤 성득식(成得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성충달(成忠達)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성세순(成世純)이며, 어머니는 김극니(金克怩)의 딸이다. 성수침(成守琛)의 아우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9년(중종 1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이 때 남곤(南袞)·김구(金絿)·김식(金湜) 및 조광조 등이 시관(試官)으로 있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그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물러나자, 그의 문인이라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과방(科榜)에서 삭제되었다.
그 뒤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초시에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버리고 청빈하게 살았다. 그러나 1566년 아들 성이(成耳)가 삭방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1568년(선조 1) 홍패를 받고 방목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기질이 영특하고 기골이 장대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19세에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시묘를 하면서 자신은 죽을 먹으면서 매일 세 번씩 상식(上食: 음식을 올림)하였다고 한다. 사후에 직제학에 추증되었고, 선조대에 기묘명인(己卯名人)으로 추복(追復: 명예를 회복함)되었으며, 물계(勿溪)의 세덕사(世德祠),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절효(節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