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치원(致遠). 경기도관찰출척사 성개(成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 성희(成熺)이고, 아버지는 성담명(成聃命)이며, 어머니는 김핍(金愊)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생원으로서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06년 주서(注書)가 되었으나 왕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중종반정 뒤 1511년(중종 6)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특별히 기용된 뒤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1514년 성균관유생을 계도할 사유(師儒) 28인 중의 하나로 선발되었다.
1518년 의정부에 의하여 재기(才器)가 있다고 추천되어 충청도관찰사의 물망에 올랐으나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박수문(朴守紋)의 반대로 임명되지 못하였다. 이듬해 기묘사화 때는 병조참지로 있으면서 입직승지를 제쳐놓고 왕의 밀명을 전달하는 등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파 제거에 앞장선 공으로 우승지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경기도관찰사로 나아가 백성들에게 염장(鹽醬)을 제공하는 등 진휼에 힘썼다. 1522년 예조참판이 된 뒤 병조참판과 공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고, 1527년 병조판서로 군권을 장악하였으나, 심광언(沈光彦)에 의하여 붕당을 이룬다는 탄핵을 받고 경상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시호는 경숙(景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