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경상북도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정재철(鄭在哲)이 1903년(광무 7)에 지은 살림집으로, 안채 · 사랑채 · 대문간채 · 고방채가 현존해 있다. 집이 완성되기까지 12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정황은 묵서된 상량기문에서 알 수 있는데, 안채 · 사랑채 · 대문간채는 1903년에 상량했고, 고방채는 1911년에 창건하고 이듬해에 중건(重建)했으며, 안대문채는 1915년에 상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채는 면이 고운 화강석 다석켜의 높은 댓돌 위에 방형 주초에 모기둥을 세운 민도릿집이다. 평면 구성은 T자형인데 안방에 이어 찬방을 돌출시켜 변형이 생겼지만, 이 점이 이 집의 특색이라 하겠다. 대청 2칸, 좌측에 안방 · 부엌 · 찬방이, 우측엔 건넌방 · 갓방 · 작은 부엌 순으로 자리했다.
사랑채 평면은 2칸이 넘는 긴 부엌을 중심으로 우측에 2칸통 사랑방과 마루가 계속되며 앞에 툇마루가 있고 뒤쪽으로는 뒷방과 툇마루가 있고 마루 우측 뒤로 반 칸 규모의 감실(사당 안에 신주를 모셔 두는 장)을 두어 사당 기능을 하게 하였다. 대신에 사당을 건립하지 않았다.
부엌 좌측엔 칸 반 규모의 중사랑방, 전면에 툇간(집채의 원칸살 밖에 딴 기둥을 세워 붙여 지은 칸살), 반 칸 크기의 책방이 있어 부엌은 안마당 쪽으로만 개방되었다. 이로 인해 중문칸이 따로 생겼다.
부엌 앞쪽을 막은 예는 1905년에 건축된 둔산동 경주최씨 종가, 1920년경의 봉화 해저리 김씨댁 등의 건물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1900년대의 시대상이 반영된 예라 할 수 있다.
고방채는 방형 4칸의 고방을 중심으로 좌측에 마구간과 뒤주가 각 1칸, 우측에 방앗간과 헛간이 있다. 판벽한 뒤주 뒤편에 내측(內厠)이 있고 주변에 돼지우리, 장작 쌓는 자리, 모탕(나무를 패거나 자를 때에 받치는 나무 토막)과 도끼들이 있어 옛 정취를 풍긴다.
우진각 지붕의 4칸 대문채는 대문칸의 우측에 행랑방 2칸, 좌측에 마구간 1칸이 있고 마구간 좌측 처마 밑으로 외측(外厠)이 있는데, 낮은 담으로 가려서 사랑채에서의 시선을 피하였다. 20세기 초의 살림집을 보여주는 한 예로, 학술적 가치가 인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