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44년에 낙랑군에 조공하고 염사읍(廉斯邑)의 읍군(邑君)으로 봉해졌다 한다. 그는 왕망(王莽) 지황연간(地皇年間, 20∼22)에 진한에 잡혀 있던 한인(漢人) 포로들을 낙랑군에 되돌아가게 해준 공로로 낙랑군 당국으로부터 관책(冠幘 : 관직자가 쓰는 모자)과 전택(田宅)을 받았다고 하는 염사치(廉斯鑡)와 같은 인물이거나 또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인물로 간주된다.
염사치는 염사읍의 ‘치’, 즉 염사읍의 수장(首長)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염사는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시 정미면 또는 경상남도 김해지방 등으로 추정되기도 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삼한사회에 있어서 읍군은 각 소국(小國) 단위의 지배자급에게 주어졌던 칭호였을 것이다. 관작을 줄 때에는 의책(衣幘 : 옷과 모자)과 인수(印綬 : 인장)를 함께 주었으며, 이러한 관작의 수수관계는 정치적인 지배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물품의 교역통로와 교역권을 공식적으로 확보한다는 경제적인 기능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