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사전투

  •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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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후기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9월에 명의 해생(解生)·양등산(揚登山) 등이 직산(稷山) 북방 소사평(素沙坪) 홍경원(弘慶院)에서 왜장 구로다(黑田長政)의 군사와 싸운 전투.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이장희 (성균관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9월에 명의 해생(解生)·양등산(揚登山) 등이 직산(稷山) 북방 소사평(素沙坪) 홍경원(弘慶院)에서 왜장 구로다(黑田長政)의 군사와 싸운 전투.

개설

평양·행주의 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 중 육전(陸戰) 삼대첩(三大捷)의 하나이다.

내용

남원을 함락한 일본군은 전주에서 합류해 경상·전라·충청 3도를 함락하면서 북상하였다. 그 가운데 모리(毛利秀元)·가토(加藤淸正)의 군사는 공주를 거쳐 전의·진천에 이르고, 그 일부인 구로다의 군사는 직산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 서울은 이미 인심이 흉흉해 사민(士民)들은 벌써 피난길을 떠나고, 조정의 백관들마저 모두 짐을 싸놓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내전(內殿)도 이미 서쪽으로 피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선조는 평양에 머물고 있는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揚鎬)에게 수차 출격할 것을 간청하였다. 접반사(接伴使)였던 이덕형(李德馨)도 선조의 뜻을 따라 적의 한강 이북의 침입을 저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양호는 9월 3일 서울에 이르러 제독(提督) 마귀(馬貴)에게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할 것을 명하였다. 그런 다음 비밀히 날랜 기병을 선발한 뒤 부총병(副摠兵) 해생(解生)을 비롯해 참장(參將) 양등산(揚登山), 유격장(遊擊將) 우백영(牛佰英)·파귀(頗貴) 등으로 남진하게 하였다.

뒤를 이어 유격장 파새(擺賽)는 정병 2,000명을 거느리고 증원군으로 떠났다. 마침내 9월 5일 동틀 무렵 명군은 직산 북방 소사평에서 구로다의 일본군과 충돌해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때 일본군은 천안을 점령한 상태로 서울을 향해 북진 중이었다.

따라서 그 선봉대는 이미 소사평을 향하고 있었다. 이 때 가장 앞에서 전군을 지휘하던 부총병 해생은 곧 작전을 지시해 좌·우·중협(中協)으로 나누어 전진, 공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마침 일본군이 흰옷을 입고 있어서, 조선의 양민으로 착각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들이 먼저 조총을 쏘아대는 것을 보고 일제히 적중을 향해 돌격했다.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마침내 크게 밀려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명나라 군사는 많은 일본군을 참수해 적진에 던지는 등 더욱 사기를 올렸다.

그리고 용맹 높은 유격장 파새가 부총병 해생의 군을 뒤따라오다가 원병 2,000명을 동시에 전선에 투입하였다. 결국 일본군은 대세가 기운 것을 알고 조총 등 무기를 버린 채 목천현(木川縣)과 청주를 향해 다투어 도망하였다.

명나라군은 1일 육합(六合)의 싸움에서 크게 이기고 뒤이어 곧 추격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제독 마귀가 너무 깊이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병력을 돌렸다가 길을 나누어 남하하기로 하였다.

한편, 적장 구로다는 직산에서 며칠 동안 주둔하면서 그곳을 모조리 분탕질하며 분을 풀었다. 그러나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철수한 다음 모리 군과 합한 뒤 공주를 거쳐서 상주에 이르렀다. 다시 가토와 합쳤다가 모리와 구로다 등은 성주로 후퇴하고 10월 중순양산으로 후퇴하였다.

소사의 패전으로 일본군은 감히 다시 서울의 침략을 꾀하지 못하였다. 이 소사싸움은 다른 싸움이 공성(攻城)과 수비였음에 비해 일대 회전(會戰)이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참고문헌

  • - 『선조실록(宣祖實錄)』

  •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 『임진전란사』중(이경석, 신현실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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