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중기에, 성균관전적, 울주판관, 영천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이어 1597년 왜가 재침하자 관찰사가 왕의 호종을 위해 떠나버려 얼마 동안 외로이 텅 빈 산성을 지켰는데, 이 때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1600년 성균관전적으로 중학교수(中學敎授)를 겸했고, 이듬해 경주제독이 되어 무너져 가는 옛 문물을 복구하는 데 힘썼다.
이 때 「성묘중건상량문(聖廟重建上樑文)」을 찬했는데, 이 내용이 『동경지(東京誌)』에 실려 있다. 이어 1602년에 울주판관을 지냈으며, 이 해 『얼안당기(얼岸堂記)』를 찬하기도 하였다. 이 해 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의 천거로 영천군수가 되었고, 1610년 창원부사를 지냈다.
1612년(광해군 4)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 뒤 다시 사헌부와 사간원의 벼슬을 거쳐, 상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여생을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은 정구(鄭逑)와 도의(道義)의 계(契)로 깊은 관계를 맺었던 성리학자이다. 정경세(鄭經世)·조호익(曺好益)·이윤(李潤)·이전(李㙉)·이준(李埈) 등 영남 명유들과도 교유가 있었다. 만년에는 역학(易學)에 전심하여 침식을 잊을 정도였으며, 평일에 독서할 때는 『논어(論語)』만 읽는 성벽이 있었다.
저서로는 『배민록(排悶錄)』 2권과 『철조록(輟釣錄)』 1권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성호문집(星湖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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