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경징(景徵), 호는 오한(聱漢)·송간(松磵). 할아버지는 군자감정(軍資監正) 손응(孫凝)이고, 아버지는 생원 손겸제(孫兼濟)이다. 어머니는 신취(辛鷲)의 딸이다.
약관의 나이로 백가(百家)의 책을 탐독, 학식이 매우 깊었다. 1585년(선조 18)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8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92년 성현찰방(省峴察訪)이 되어 왜란을 당하자 중대를 모아 역마(驛馬)를 적절히 배치하면서 전쟁 수행에 만전을 기하였다.
이어 1597년 왜가 재침하자 관찰사가 왕의 호종을 위해 떠나버려 얼마 동안 외로이 텅 빈 산성을 지켰는데, 이 때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1600년 성균관전적으로 중학교수(中學敎授)를 겸했고, 이듬해 경주제독이 되어 무너져 가는 옛 문물을 복구하는 데 힘썼다.
이 때 「성묘중건상량문(聖廟重建上樑文)」을 찬했는데, 이 내용이 『동경지(東京誌)』에 실려 있다. 이어 1602년에 울주판관을 지냈으며, 이 해 『얼안당기(얼岸堂記)』를 찬하기도 하였다. 이 해 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의 천거로 영천군수가 되었고, 1610년 창원부사를 지냈다.
1612년(광해군 4)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 뒤 다시 사헌부와 사간원의 벼슬을 거쳐, 상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여생을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은 정구(鄭逑)와 도의(道義)의 계(契)로 깊은 관계를 맺었던 성리학자이다. 정경세(鄭經世)·조호익(曺好益)·이윤(李潤)·이전(李㙉)·이준(李埈) 등 영남 명유들과도 교유가 있었다. 만년에는 역학(易學)에 전심하여 침식을 잊을 정도였으며, 평일에 독서할 때는 『논어(論語)』만 읽는 성벽이 있었다.
저서로는 『배민록(排悶錄)』 2권과 『철조록(輟釣錄)』 1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