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선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 및 국내외 연락 업무를 수행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5년(고종 32)
사망 연도
1942년
출생지
경상북도 칠곡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 및 국내외 연락 업무를 수행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경상북도 칠곡 출신. 1919년 3·1운동 때 향리인 칠곡군 일대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에 가담, 활동하였다.

3·1운동의 결과가 여의하지 못하자 폭 넓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1920년 북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곳에서 독립운동가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군자금을 모금하기로 하고 서병철(徐丙哲)·박소용(朴韶鏞) 등과 국내로 잠입, 활동하였다.

국내 각지를 내왕하면서 군자금을 조달, 몇 개월 사이에 대구에서 최종적으로 2,000원을 모금하여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냈다. 그러나 미행하던 일본형사에게 붙잡혀 1921년 6월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 뒤 다시 독립운동을 계속할 목적으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이동녕(李東寧) 등과 여러 차례 연락하면서 국내외를 연결하는 데 중추적인 임무를 수행하였다.

1925년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의 자금협조를 요청하는 지령서를 전달받고 이를 인쇄하여 동지들에게 배포하면서 더 많은 군자금을 임시정부로 조달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다시 붙잡혔다.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이현희, 집문당, 1982)
「대구복심법원판결문(大邱覆審法院判決文)」
집필자
이현희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