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칠곡 출신. 1919년 3·1운동 때 향리인 칠곡군 일대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에 가담, 활동하였다.
3·1운동의 결과가 여의하지 못하자 폭 넓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1920년 북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곳에서 독립운동가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군자금을 모금하기로 하고 서병철(徐丙哲)·박소용(朴韶鏞) 등과 국내로 잠입, 활동하였다.
국내 각지를 내왕하면서 군자금을 조달, 몇 개월 사이에 대구에서 최종적으로 2,000원을 모금하여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냈다. 그러나 미행하던 일본형사에게 붙잡혀 1921년 6월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 뒤 다시 독립운동을 계속할 목적으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이동녕(李東寧) 등과 여러 차례 연락하면서 국내외를 연결하는 데 중추적인 임무를 수행하였다.
1925년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의 자금협조를 요청하는 지령서를 전달받고 이를 인쇄하여 동지들에게 배포하면서 더 많은 군자금을 임시정부로 조달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다시 붙잡혔다.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