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호봉(瑚烽). 경상북도 월성 출생.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외교권 박탈에 항거하여 을사조약 결사반대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12년 4월 6일에는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4개월간 구속되어 고문을 받았다.
그 뒤 1914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국내 동지들의 귀국 요청에 따라 1915년에 은밀히 잠입하여 국내정세의 탐지 및 군자금 모금활동을 폈다. 민충식(閔忠植)과 동지 규합에 힘쓰는 한편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를 지도하면서 청년층을 포섭하였다.
1917년에 일본경찰에 잡혀 1년간 유배형을 받았다. 출옥 뒤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9년 4월 10일 상해(上海) 프랑스 조계에서 임시의정원의 조직에 참여하였고, 파리국제회의에 파견할 민족대표 선출에도 참가하였다.
그 해 4월 2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평정관(評定官)과 교통위원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의 기본방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 무렵에는 국내외에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하여 8개의 임시정부가 난립하자, 각처의 책임자들과 실무적으로 접촉하면서 단일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