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울진 출생. 만주 봉천성 유하현 일대의 이탁(李鐸)·안경식(安景植)·차병제(車秉濟)·주병웅(朱秉雄)·박진태(朴鎭台) 등과 함께 이완용(李完用) 등 이른바 5적(五賊)·7적(七賊) 암살을 목적으로 27결사대를 조직하였다.
1919년 3월 3일 고종의 인산(因山)을 기회로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동시에 이완용 등 5적·7적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만주로부터 권총의 입수가 늦어져 거사는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뒤 3월 10일경에는 이탁이, 3월 15일경에는 이종욱(李鍾郁)이 각각 권총을 입수하자 이를 나누어 휴대하고 우선 군자금 모금에 나섰다.
3월 31일 밤 차병제 등과 서울 효자동 김중환(金重煥)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4월 15일에는 차병제 등과 서울 무교동 박홍일(朴泓鎰)에게서 군자금 500원을 받았다. 4월 20일에도 이기원(李基源)의 선도로 차병제·박기한(朴基寒)과 서울 인사동의 한봉취(韓鳳翠)에게서 군자금 120원을 받아 이를 국외로 전달하였다.
그뒤 5월 15일 일본경찰에 잡혔고 다른 동지들도 손창준의 체포를 전후하여 모두 붙잡히게 되었다. 이들은 당시 세간에 이완용암살단으로 크게 알려졌으며, 1920년 9월 서울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