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숙함(叔咸), 호는 과암(果菴). 송시열(宋時烈)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교관 송무원(宋婺源)이다.
1753년(영조 29) 좌의정 이천보(李天輔)의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다.
이 후 자의(諮議)·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 등을 거쳐 1767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 정조가 즉위한 뒤 홍국영(洪國榮)의 뒷받침으로 1776년 동부승지·이조참의·예조참의·한성부좌윤·좨주(祭酒) 등을 거쳐, 1779년(정조 3)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해 홍국영이 실각하자 삼수부(三水府)에 안치되었다. 그 뒤 왕위계승에 대하여 올린 소에 흉역(凶逆)의 뜻이 있다 하여 옥에 갇히고 많은 유생의 공격을 받았다. 철저한 학문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채 대학자의 후예로서 한때 세도세력에 힘입었으나 결국 함께 몰락하였으며, 노론벽파(老論辟派)로 몰려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