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덕상

  • 역사
  • 인물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동부승지, 이조참의, 예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과암(果菴)
  • 시호문간(文簡)
  • 숙함(叔咸)
인물/전통 인물
  • 본관은진(恩津: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
  • 사망 연도1783년(정조 7)
  • 성별남성
  • 주요 관직동부승지|이조참의|예조참의
  • 출생 연도1710년(숙종 36)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박정자 (전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5년 06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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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동부승지, 이조참의, 예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숙함(叔咸), 호는 과암(果菴). 송시열(宋時烈)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교관 송무원(宋婺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53년(영조 29) 좌의정 이천보(李天輔)의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다.

이 후 자의(諮議) ·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 등을 거쳐 1767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 정조가 즉위한 뒤 홍국영(洪國榮)의 뒷받침으로 1776년 동부승지 · 이조참의 · 예조참의 · 한성부좌윤 · 좨주(祭酒) 등을 거쳐, 1779년(정조 3)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해 홍국영이 실각하자 삼수부(三水府)에 안치되었다. 그 뒤 왕위계승에 대하여 올린 소에 흉역(凶逆)의 뜻이 있다 하여 옥에 갇히고 많은 유생의 공격을 받았다. 철저한 학문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채 대학자의 후예로서 한때 세도세력에 힘입었으나 결국 함께 몰락하였으며, 노론벽파(老論辟派)로 몰려 죽었다.

참고문헌

  • - 『영조실록(英祖實錄)』

  • - 『정조실록(正祖實錄)』

  • - 『은파유고(恩坡遺稿)』

  • - 『청선고(淸選考)』

주석

  • 주1

    : 가계 : 과암선생문집(果菴先生文集) 卷十五, 송덕상묘지명.(한국문집총간)

  • 주2

    : 삼수 유배 : 정조실록12권, 1781년(정조 5) 9월 14일. "호서 유생 연덕윤이 송덕상을 위해 통문을 보내어 선동하자 송덕상을 안치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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