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희문(希文). 아버지는 송정(宋珽)이다.
당시 북변(北邊)에 시끄러운 일이 많아 재능이 있고 용감한 자를 뽑게 되었는데, 이항복(李恒福)이 송시범을 천거하자 임금이 특별히 화살과 손오병법(孫吳兵法)을 내리었다.
1608년(선조 41)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다가 3년의 모친상을 마친 뒤 선전관을 거쳐 비변사 낭관이 되었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로 많은 신하들이 죄를 얻자 송시범도 소를 올렸고 마침내 벼슬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인조의 잠저 때부터 이서(李曙)와 친교가 있어 지략이 뛰어남을 인정받아 1623년 인조반정 때는 무공을 세워 별장이 되어 궁중에 입직하였다.
이듬해 곽산군수·운산군수로 부임하였을 때,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에 암행어사로부터 인조의 친서를 받고 단신으로 이괄 군중에 들어가 유숙까지 하였으나 이괄을 만나지 못한 채 돌아오다가 희천에서 급사하였다.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고 호산군(壺山君)에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