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의 전함사(典艦司)에 배속되어 선박의 건조나 수리 등의 일에도 참여하였다.
충주 가흥창(可興倉)에 기지를 둔 좌수운과 배천 금곡포창(金谷浦倉)에 기지를 둔 우수운 각 1원(員)이 있었는데, 좌수운은 경상도·충청도 일부지역, 우수운은 황해도 일부지역의 세곡(稅穀)의 운송을 지휘, 감독하였다. 한강수로는 고려 중기 이후 폐쇄되었으나 1390년(공양왕 2)정몽주(鄭夢周)의 건의로 좌수운과 우수운이 설치되었다.
좌수운에는 조선 15척, 조졸(漕卒 : 水夫) 60인, 봉족(奉足) 120인이 소속되어 있었으나 우수운은 미상이다. 금곡포창의 우수운은 장단 장산곶에서 해난사고가 잦아 중기 이후 폐쇄되어 장산(長山) 이북 11읍은 화폐로 대납하게 하였으며,『대전회통』에 의하면 좌수운도 폐지되었다 한다. 그 뒤 가흥창의 세곡운송은 충주목사가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