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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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녕군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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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지리
지명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옛 지명.
이칭
이칭
사정화현(史丁火縣), 화산(花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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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옛 지명.
내용

본래 신라의 사정화현(史丁火縣, 또는 花山)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 신녕으로 고쳐 양주(良州) 소관의 임고군(臨皐郡: 지금의 永川)의 영현으로 삼았다. 1018년(현종 9) 경주부(慶州府)의 임내가 되었으며, 1390년(공양왕 2) 감무를 두었다.

1394년(태조 3) 영주(永州) 임내인 이지현(梨旨縣)을 이곳으로 이속하였으며, 1413년(태종 13) 현감으로 고치고 치소를 장수역(長壽驛)으로 옮겼다. 1508년(중종 3) 이곳을 혁파하였다가 1514년 복구하였다. 1895년(고종 32) 대구부(大邱府) 소관의 신녕군으로 하였다가 다음해 경상북도 관할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영천군에 병합하였다.

사정화(史丁火: 火는 벌의 뜻임)의 지형은 배〔舟〕와 같이 생겼으며, 한들(지금의 莞田洞)에는 3m 높이의 자연석인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고, 봉화제(烽火堤) 바람이 세차게 불면 갑령제(甲嶺堤)를 중심으로 물이 남북 방향으로 흩어져, 이 지역은 풍수 지리적으로 풍파를 막기 어려운 지형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고을의 지명 유래는 바다의 풍파를 막아 평안하게 지나게 한다는 뜻에서 신녕으로 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금호강의 지류인 서천(西川)과 북천(北川) 유역에 자리 잡은 산간분지로서, 북쪽으로는 갑현(甲峴)을 통하여 의성과 모현(茅峴)을 넘어 청송과 연결되었다. 남쪽으로는 영천 영내에 있는 신녕의 월경처(越境處)인 이지(梨旨)의 옛 현을 통하여 하양(河陽)과 양야원(陽也院)을 지나 영천과 연결되었다.

신녕의 치소 부근의 장수도(長壽道)는 역참으로 14개 역을 관할하였으며 찰방이 이곳을 다스렸다. 또한, 여음동(餘音洞)의 봉수는 남쪽의 시산(匙山), 북쪽의 토을현(吐乙峴) 봉수와 연결되어 군사ㆍ교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동지지(大東地志)』
『경상북도사(慶尙北道史)』(경상북도사편찬위원회, 1983)
『한국지명요람(韓國地名要覽)』(건설부국립지리원,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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